하얀 벽지를 좋아한다. 처음 도배했을 때의 하얀 벽지 말이다. 도배하시는 분들이 발라놓은 풀 냄새가 채 가시기 전의 그 아무런 낙서도 되지 않은 하얀 벽지. 그 냄새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그 보송보송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더 좋아하는 것은 그 하얀 벽지가 약간은 변색이 되어 있을 때이다. 낙서가 되어 있거나 아이의 코딱지가 묻어 있지 않은 그렇지만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받아서 약간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는 그런 벽지를 좋아한다.
가죽을 좋아한다. 가죽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 가죽 자체가 처음 주는 냄새 손끝에서 느껴지는 서걱거림도 좋아하지만 '태닝'이라는 단계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줄 질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결혼에서 산 금속 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그 시계에 어울리는 가죽 줄을 맞추고 그 가죽 줄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피부색과 비슷해져 가는 것이 그래서 반들반들해지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벽지처럼 가죽처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 커피도 간단하게 마시는 믹스 커피도 좋아하지만 아침부터 애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잘 구워진 콩을 갈아서 내리는 드립 커피를 좋아하고 바로 잔에 따라서 마시는 와인보다는 따라놓고 한참을 얘기하다가 마시는 묵직한 와인을 더 좋아한다. 오디오도 새로 산 엄청 인테리어 효과가 미친 스피커보다는 10년이 넘어서 이제는 음악을 내는 것도 힘들어하는 그래서 지지직 거리는 앰프와 후줄근한 선 그리고 옮기면서 자유 낙하한 한 귀퉁이가 찌그러진 JBL의 4312M 모니터의 약간은 불분명한 소리를 좋아한다.
어느샌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채워가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더라도 자동으로 원하지 않는 부분을 지워주는 AI보다는 여러 번이고 자꾸 원하는 것을 찍기 위해서 사진기를 드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 자동으로 자동으로 빨리빨리 되는 것보다는 방망이를 깎는 노인처럼 하나하나 배워나가면서 몸에 익히고 꾸역꾸역 해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 어느새 내 안에 누렇게 약간은 바래진 벽지가 그리고 반들거리는 내 맘에 쏙든 태닝 된 가죽이 나를 하나하나 발현시켜가는 것을 느낀다.
시간을 가지자. 조급해하지 말자. 하루에도 여러 번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