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로 살아간다는 것

서평 10: 《나의 어린 내담자》 (토리 헤이든 지음)

by illa mulier

“선생님은 절 도와줄 수 있을 거랬어요.” 난데없이 한 여자아이가 찾아왔다. 가방에는 과다 복용하면 치명적인 진통제가 다섯 상자나 들어 있었다. 도움을 구하러 왔다지만 아이는 방어적인 태도가 역력했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도 잔뜩 늘어놓았다.


열다섯 살의 엘로이즈는 결손가정 안에서 학대를 겪고 위탁보호를 받아온 아이였다. 남동생은 학대로 인한 뇌 손상으로 사망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엘로이즈는 여동생 에비와 각각 다른 위탁가정에 배정되었고 이후 여동생은 새 가정에 입양되었다. 엘로이즈는 친모와 살게 되었지만 열 살 무렵 친모의 남자친구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뒤 위탁가정에 배정되었다. 잠시 친부, 할머니와도 살았으나 친부는 마약 문제로 감옥을 들락거렸고 할머니와는 언어 문제로 소통이 어려워 다시 위탁가정인 파월 가족에게 보내졌다.


파월 가족은 따뜻했다. 특히 언니뻘 되는 헤드웬이 엘로이즈를 살갑게 대해주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엘로이즈는 헤드웬에게 집착하며 갖가지 문제를 일으킨 탓에 다른 위탁가정에 배정되었다. 그럼에도 헤드웬에 대한 집착은 가실 줄 몰랐고, 엘로이즈는 자꾸만 파월네 집을 찾아가곤 했다. 반복되는 문제 상황 속에서 엘로이즈의 담당 사회복지사가 저자의 이름을 꺼냈다. “언젠가 토리 선생님과 이야기해볼 수 있을 거야. 확신할 순 없지만 그분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 말만 듣고 무작정 저자를 찾아간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엘로이즈는 까다로운 내담자였다. 자기 감정에 관해서라면 입을 꾹 다물었고, 저자가 의도하는 치료 방법을 전혀 따라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저자는 취약계층 특수아동의 집단 활동에 엘로이즈를 데려가기로 했다. 엘로이즈에게 보조 역할을 맡기고 오가는 차 안에서 편안하게 대화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엘로이즈가 ‘올리비아’라는 가상 인물을 지어내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늘 말썽을 일으키고 모난 태도를 보이는 엘로이즈를 저자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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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정했다. 엘로이즈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삐쭉삐쭉 날 선 언행을 이어가는 엘로이즈 곁에서 그저 큰 나무처럼 머물렀다. 사실 저자도 자라면서 힘든 현실을 이겨내려고 ‘딜라일라’라는 가상 인물을 지어낸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엘로이즈는 전에 없는 관심을 보였고,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는 저자를 매우 고마워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같은 모습인 올리비아가 엘로이즈에게는 꼭 필요했다.


이후 엘로이즈는 궂긴 사건에 휘말려 청소년 보호소에 들어가고 소년법원에도 섰다. 하지만 꼬박꼬박 눈앞에 저자가 찾아오자 엘로이즈도 서서히 속내를 풀어내며 헤드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다. 그 사이 친부가 마약 문제를 해결했다며 함께 살기를 요청했다. 친부 가정으로 돌아가면서 엘로이즈와 저자의 관계는 종료되었다. 15년 뒤, 두 사람은 페이스북 메시지로 다시 연락이 닿았다. 친부는 결국 마약 문제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다행히 엘로이즈는 새엄마 엘런이 준 안정감과 지지 속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성장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라면 엘로이즈와 같은 아이를 다섯 계절이나 상대하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엘로이즈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몰랐다고 인정하고 서서히 방법을 찾아냈다. 그렇다. 나는 나 외에 누구의 삶도 살아보지 못한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온갖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는 배우자라도 ‘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 점을 자주 되새기고 사랑하는 사람 곁에 그저 존재해야겠다. 너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네 곁을 비우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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