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숲 사람들의 신년하례회
작년 하반기 동안 숲해설가 교육 과정을 거쳤던 연구소에서 신년하례회를 열었다.
선물 나눔 시간이 있으니 소소한 선물을 준비해 오라는 안내에 무엇을 준비할까 하다가, 2025년 한 해 동안 내가 읽은 책들에서 발견한 숲에 관한 아름다운 글 10편을 추려 한 장 한 장 적어서 출력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에 출간된 나희덕 시인의 시집 《시와 물질》 한 권도 넣었다.
나희덕 시인의 시들과 더불어 작년 한 해 내가 마주한 글들에는 지상 모든 존재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 하나 우리의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중 한 시는 이렇게나 정겹다.
봄을 드시다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p.15)
할머니 세분이 정자에 앉아 막걸리를 드신다
팽나무 그림자도 드시고
찔레꽃 향기도 드시고
써레질 끝난 논바닥 찰랑거림도 드신다
읍내 가다가 거나하게 취하신 세분 보고 피해 가려는데
엄나무집 할머니 손짓이 내 눈보다 빠르게 불렀다
엄니 허리 수술한 건 어찌 됐느냐고
군청 다니는 조카 있는데 만나보라고
오십 넘어 결혼하는 사람도 많다고
젊으니께 엄니 속 썩이지 말라고
내리쬐는 햇볕까지 끌어모아 불콰하게 만드는데
갑자기 손을 펴란다
두 손 쫙 펴니 생과자 한가득 쏟아주며
이거 먹고 생각해보란다
막걸리가 딸꾹딸꾹 햇살을 먹고 있다
모임 세 시간 전에 연구소에 도착해 일손을 보탰다. 앞서 교육 과정을 수료한 여러 기수의 선배님들과 더불어 전을 부치고 떡국에 넣을 지단을 만들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들 했는데, 사실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이 하는 얘기 아닌가. 그래도 좋았다. 나란히 서서 음식을 만들고 자리를 정돈하는 이 사람들이 저마다 숲에 들어가면 자연과 교류하며 깊은 관상에 들어가겠지 하는 마음에.
서른 명 남짓이 모였다. 연구소장님의 짧은 신년사를 시작으로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사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한창 숲해설가로 활동하시는 선생님께서 고르셨으면 했다. 숲해설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 있는 글을 숲에서 함께 읽으며 감상을 나누는 일이 무척이나 소중하니까. 그런데 나의 선물은 뜻밖에도 연구소장님께 돌아갔다. 평소 글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라 내가 고른 10편의 글 중 이미 알고 계신 것들도 많았을 듯했다. 어쩔 수..
내게 온 선물은 산악 경험이 있으신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다채로운 밧줄이었다. 숲에 찾아온 아이들이 그렇게 밧줄놀이를 좋아한다고 하시면서 이런저런 놀이에 활용하라셨다. 산악인들이 쓰는 줄이기에 일반 줄보다 촉감도 좋을 거라고. 참 나는 복도 많지! 잘 연구해서 한 해 내내 숲에서 아이들과 안전하게 놀아야겠다. :)
모임을 앞두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생각해 보았는데, 막상 모임에 와서는 음식 준비하고 진행을 돕느라 차분히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생각을 가다듬을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각 개인에게는 초대 문자를 받고 모임에 오기까지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진정한 의미의 신년맞이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 시간 동안 한강 작가의 산문집 《빛과 실》을 읽었다. 작년에 그의 장, 단편 소설을 모두 읽은 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천천히 읽어가는 중이다. 그중 아래 구절이 한 해를 시작하는 내게 깊이 와닿았다.
이 일이 나의 형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지난 삼 년 동안 서서히 감각해왔다. 이 작은 장소의 온화함이 침묵하며 나를 안아주는 동안. 매일, 매 순간, 매 계절 변화하는 빛의 리듬으로.
─ 한강, 《빛과 실》 p.97
작가는 마흔여덟에 처음으로 자기 명의의 집을 장만하고 마당에 정원을 꾸몄다. 조경사의 도움을 받아 미스김라일락, 청단풍, 불두화, 옥잠화, 호스타, 맥문동을 심었다. 정원에 빛이 잘 들지 않아 거울을 여러 개 가져다가 시간마다 옮겨가며 빛의 방향을 터 주었다. 위 글에서 '이 일'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삼 년이란 시간 동안 빛에 관해,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관해, 식물의 반응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깊게 변화하는 자신을 '감각했다고'. 참 그답다.
올해 나는 번역가로, 또 숲해설가로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까. 그 과정에서 나의 형질은 어떻게 변화할까.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깊디깊은 한 해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