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함께하는 해닫이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앞에서

by illa mulier

2025년의 마지막 날,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앞에 섰다.

20251231_124015.jpg 400여 년이 넘도록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온 탱자나무

거듭된 전란 이후 외적의 접근을 막고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강화도에 많이 심었는데, 그 가운데 이 나무는 꿋꿋하게 살아남아 1962년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이와 나란히 강화도 갑곳리에 있는 갑곶 탱자나무도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탱자나무에 가시가 나 있다는 건 알고 왔지만, 이토록 윤기 나는 납작한 초록 줄기로부터 짱짱한 가시를 사방으로 뻗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소심하게 주춤하는 마음이 싹 달아난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탱자나무를 마주하고 서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KakaoTalk_20251231_182147086_14.jpg 가지마자 빽빽하게 나 있는 탱자나무 가시

저 위에는 아직 탱자 열매 몇 개가 달려 있다. 책을 읽어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감귤류를 기르는 데 접목하기 위해 탱자나무를 이용할 뿐 탱자 열매 자체는 너무 시어서 먹지 못한다고 하는데,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면 옛날에는 다 먹었다고 한다. 너무 시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저렇게 작아도 그 짜릿한 맛을 고스란히 담고 있겠지.

KakaoTalk_20251231_155352983_04.jpg 아직 나무를 포기하지 않은 탱자나무 열매들

그런가 하면, 가시 위에는 곁눈들이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다. 이미 2026년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구나. 내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KakaoTalk_20251231_155352983_02.jpg 곳곳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는 탱자나무의 곁눈들

온몸에 가시를 두르고 있는 나무를 보았는데도 마음이 밝고 가지런히 펴지는 느낌이 들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굴러 떨어져 가시에 찔리고도 씩씩했던 아이가 곱게 자라 곱게 늙는 중 ㅋㅋㅋ"

"내 땅이 생기게 되면 탱자나무로 둘레를 칠 거라고 늘 생각했어!"

"옛날에 외갓집 울타리가 전부 탱자나무였어."

"4월부터 10월까지 저희 집 탱자나무 모습이에요." (+사진 8장)


나무 한 그루로 여기저기서 이야기꽃이 핀다. 2025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보낼 수 있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 사기리 탱자나무 옆에도 큼지막한 무궁화나무가 말동무가 되어 서 있었다.

KakaoTalk_20251231_182224586.jpg 탱자나무 옆에 서 있는 무궁화나무

2026년에도 한 해 내내 자연을 만나면서 내 안을 들여다보고 사람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살 수 있기를. 모두모두 Green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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