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서평 3: 소설 《아몬드》 (손원평 지음)

by illa mulier

소년은 웃지를 않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저 차분한 아이려니 생각했던 엄마는 아이가 만 네 살이 지나도록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의사를 찾아갔다. 병명은 감정 표현 불능증. ‘표현’ 불능이라고는 하지만 소년은 감정 자체를 잘 느끼지 못했다. 검사 결과, 소년은 감정 처리를 담당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가 정상인보다 작았다. 소년의 엄마는 편도체의 모양과 크기가 아몬드 같으니 아몬드를 많이 먹으면 머릿속 아몬드도 커질 거라는 생각에 소년에게 아몬드를 많이 먹였다. 그럼에도 소년의 머릿속 아몬드는 자극이 들어와도 불이 잘 켜지지 않았다.


여섯 살 때는 죽도록 얻어맞는 십 대 학생을 눈앞에서 보고도 ‘무척 위험한 상황’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이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목격자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피해 학생의 아버지는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하지 못한’ 소년을 매섭게 나무랐다. 몇몇 사건을 겪은 후 엄마는 소년의 특급 감독이 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맞춤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상대방이 웃는다.→똑같이 미소를 짓는다.’와 같은 온갖 문장을 색종이에 적어 커다란 전지에 붙이고 그 전지를 벽에 붙여 놓았다. 이 친절한 감독은 선수가 던지는 물음에도 빠짐없이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심지어 ‘희로애락애오욕 게임’까지 만들어 선수에게 상황을 제시하고 감정을 알아맞히게 했다. 소년은 특급 감독인 엄마, 든든한 떡갈나무 같은 외할머니 이렇게 두 사람과의 세상 속에서 자랐다.


중학교 3학년 크리스마스이브, 소년의 생일이었다. 소년은 엄마, 외할머니와 함께 생일 기념으로 식당에서 냉면과 왕만두를 먹었다. 식당 종업원이 가져다줄 사탕을 기다리는 소년을 뒤로하고 엄마와 외할머니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내리는 눈을 보며 한껏 즐거워했다. 그때, 삶을 비관한 한 남자가 망치로 엄마의 머리를 네 번 내리찍었다. 이때 밖으로 나가려던 소년을 외할머니가 밖에서 가로막으며 문 앞을 몸으로 막아섰고, 남자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소년은 점점 더 빨개지는 유리문을 바라보며 다른 모든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외할머니는 숨을 거뒀고, 엄마는 깨어날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병원에 누워 숨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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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을 잃은 선수는 ‘엄마라면 뭐라고 조언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홀로 삶을 부딪히기 시작한다. 엄마가 운영하던 헌책방도 보름 만에 다시 문을 열었고,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삶을 기대했을 엄마의 뜻을 생각해서 학교에 다니기로 결심한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소년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한다. 책방 2층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심 박사는 감독을 잃은 이 선수에게 때마다 좋은 코치가 되어 주었다. 한편, 소년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있었다. 외모도 비슷하고 나이도 같은 곤이라는 친구였다.


소년이 먼저 만난 사람은 곤이가 아니라 곤이의 아빠였다. 그는 곤이가 어렸을 때 길에서 곤이를 잃어버리고 병을 얻어 삶의 끝을 앞둔 곤이 엄마에게 곤이인 척 마지막 인사를 해달라고 소년에게 부탁했다. 곤이 아빠와 엄마를 차례로 만난 소년 앞에 곤이가 나타난다. 큰 상처를 가슴에 안고 거친 외피를 두른 곤이는 소년을 위협하지만, 소년은 두려움을 모르는 탓에 곤이에게 굴복하는 법이 없었고 둘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후 곤이는 계속 소년을 찾아 책방에 오곤 했지만, 소년이 먼저 곤이에게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그사이 도라라는 여학생도 소년과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곤이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소년은 심 박사에게 조언을 구했고, 소년은 사라진 곤이를 찾으러 갔다가 곤이 대신 흉기에 찔려 정신을 잃는다.


소년이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기적처럼 엄마가 깨어났다. 휠체어를 타고 자신을 보러 온 엄마를 보고는 뭔가를 말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놀랍게도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고 웃는 소년을 보고 엄마도 울고 웃었다. 이후 스무 번째 봄을 맞이한 소년은 착한 친구 곤이를 만나러 가면서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p.277)


소년은 ‘정상인’과 어울려 살기 어려운 병을 가졌다. 그럼에도 포기를 모르는 긍정왕 감독인 엄마의 교육과 사랑 속에, 다음에는 자기 삶에 차례로 등장하는 심 박사, 곤이, 도라의 편견 없는 관심을 받으며 그때그때 맞닥뜨리는 상황에 부딪혀 본다. 소년과 같은 병이 없는 나에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먼 데 눈 두지 말고 지금 내 삶에 생겨나는 호기심을 가만히 따라가며 그때그때 맞닥뜨리는 것들을 경험해야겠다.


덧) 소년의 이야기 뒤에 한 남자의 이야기가 외전으로 실려 있다. 그는 소년의 엄마와 외할머니가 변을 당할 때 우두커니 서 있던 행인 중 한 명이었다. 남을 돕다가 가진 것을 전부 잃은 형을 둔 탓에 남의 일에 괜히 나서지 말자는 철칙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자신의 등을 떠미는 형의 손길을 느꼈고, 유리문 뒤에 서 있던 소년의 얼굴을 잊지 못해 장례식장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소년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남을 돕는 일에도 잠시 관여한다. 이렇게 그의 삶에도 작은 변화의 실마리가 생겨나고, 그 역시 다가오는 삶을 조금씩 부딪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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