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과 자연의 고요한 엉겁

EP08, 공백(언터처블 하트), 에스에프랩

by 건축에세이 일렁

[Prologue]

폐허의 적막과 자연의 격정. 건축가는 대상지에서 느낀 이러한 감정이 리모델링이라는 이성적 구축 이후에도 잔존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기존 창고에서 본질을 제외한 요소들을 과감히 비워내고, 자연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렇게 버려졌던 두 채의 냉동창고는 손질을 거쳐 갤러리가 되었고, 새롭게 신축된 카페가 더해져 복합문화공간 '공백'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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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텅 빈 진입마당]

공백(空白)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음'이다. 진입마당은 이 컨셉에 제대로 취해있다. 자갈밭과 바다를 향해 뻗은 길, 그 옆에 사이니지가 박힌 철망 상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건축가가 남기고자 했던 감정의 복선과도 같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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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향한 런웨이]

건축가는 버려진 냉동창고의 거대한 공간감과 이를 고조시키는 레멘구조의 규칙적 반복만을 남김으로써 적막과 격정을 간직하고자 했다. 또한 SNS의 이미지들을 분석하며 이곳에 방문할 사람들이 건축을 어떻게 소비할지 예측했다. 그 결과 자연을 배경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하며 '폐허에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시나리오를 담았다. 갤러리 A에서는 패션쇼 런웨이의 상호 보여짐을 통해 이를 경험하도록 의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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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끝의 계단을 오르면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슬레이트 지붕이 마치 공연장의 무대막처럼 바다를 서서히 보여준다. 제주의 풍수를 상설전시하는 공간이다.


[폐허 속 엉겁]

황무지 같은 사잇길을 지나 도착한 갤러리 B는 포탄은 맞은 폐허처럼 어질러져 있다. 한가운데 정갈한 유리 전시실이 놓여있는 것과 대비된다. 유리박스는 바다의 습기와 염분을 피해 지면과 이격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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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 인공물과 자연물의 엉겁이 많이 보인다. 현무암과 타일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애써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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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진입마당 우측의 신축 카페는 두 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상층에서 먹거리를 사고 지하층에서 취식하며 바다를 감상하는 카페이다. 진입마당에서 본 낭만적인 바다와는 달리 철썩이는 파도와 바람에 몸져누운 풀들이 매서운 바다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더, 조명, 테이블 다리와 같은 선들이 바다로 뻗어 공간에 방향성을 부여한다. 거더가 기둥에 꽂히듯, 조명이 멀리언과 만나는 것이 군더더기 없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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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콘크리트인 가운데 지하층으로 연결되는 계단만이 나무합판으로 마감되어 있다. 난간벽이 말려 올라가는 것이 나무합판으로 강조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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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공간편집]

현재의 공백은 또 한 번 편집되었다. 갤러리 A와 B는 각각 안경점과 식당으로, 카페는 또 다른 두 개의 카페로 나누어졌다. 진입마당은 말끔하게 포장되었고 새로운 잡화점들이 들어섰다. 2년 만에 이러한 변화가 생겼다는 건 상당히 재미난 일이다. 건축가의 개념이 무너진 것은 아쉽지만 지금처럼 한 대지에 다양한 기능이 어우러진 모습이야말로 복합문화공간에 걸맞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공백.jpg 현재의 공백

특히 안경점과 식당은 건축가가 남긴 날것의 감성을 살려 멋스러운 공간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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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점으로 편집된 갤러리 A / 식당으로 편집된 갤러리 B


[Epilogue]

건축가는 폐창고와 처음 마주했을 때에 느꼈던 적막함,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허(虛)를 보존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거칠지만 솔직한 구조체에 장식을 최소화했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낡아가는 철골, 이와 반대로 성장하는 자연물이 엉키는 장치 또한 그러한 목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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