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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집에 있을 거라면 여기가 쉬운걸

#미국 예찬은 아닙니다만

by 인아

격리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법으로 외출을 금지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수치로 규정하는 상황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경우다. 모두에게 그럴 테지. 처음에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무감각했다. 한국이 한참 심해질 때 이 곳은 잠잠해서 내심 아가들이 안전한 곳에 있음에 안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 곳이 더 시끄러워졌다. 점차 코 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뉴스들을 매일 들으며 숨이 막혔다. 공포가 심해지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어책을 찾았다. 불안증이 심해져 괜히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소독하고 집 앞에 쓰레기라도 버리고 오면 즉시 모든 옷을 벗어 빨아 댔다. 이 곳에서 마스크는커녕 손 소독제와 클로락스(락스) 마저 구경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다 사는 휴지도 우리는 못 샀다. 이들은 휴지가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덕분에 휴지 한 롤이 줄어들 때마다 마음이 작아지는 것은 덤이었다. 그것도 몇 주가 지나며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며 무기력해졌다. 새로운 생활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오래된 연인과 이별을 하는 과정과도 비슷했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전시 상황이었지만 우습게도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시댁과 미세먼지가 가득한 한국보다는 여기가 쉬웠다. 나에겐 백 배 쉬웠다. 신랑 들으면 서운할 소리, 시댁 들으면 빡쳐할 소리일지라도 어쩌겠는가,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적자면 그랬다. 여기가 좋았다. 여긴 공기가 맑았다. 창 밖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든 환기를 원할 때 창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같은 아파트일지라도 층간 소음에 훨씬 덜 예민했다. 전반적으로 방음이 한국보다 덜되서 인지 아니면 아파트라 다 함께 포기하고 살아서인지 모르겠다. 윗집 소리가 꽤나 요란하게 들리지만 내 마음도 한결 여유로웠고, 아랫집도 우려와 달리 단 한 번 얼굴 찌푸린 적이 없다. 고마운 마음에 우리가 소소하게 감사 인사를 남긴 적은 있다. 아이들이 적잖이 뛸 텐데도 지나가다 눈을 마주치면 그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아이들에게 웃어준다. 한국의 날 선 아랫집들에 비하면 모두 천사들이다 아주. 물론 이것도 사람 바이 사람, 케바케이므로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리고 아무 때나 문을 불쑥 열고 들어오는 시댁 식구가 없어서 좋았다. 생전 보지도 못한 시댁 오촌 아저씨 부인의 장례식에 급작스럽게 아이 둘을 태우고 2시간 넘게 가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시어머니 친구분 방문에 온 가족이 밥 먹다 말고 내려가서 인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김치 잘 안 먹는 우리 가족은 다 먹지도 못할 김치를 80포기나 하러 주말을 비워 놓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불합리하게 불려 다녔다 느끼는 가족 행사만 나열해도 나는 한 권의 책을 쓸 자신이 있다. 어쨌든 이런저런 가족 대소사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되어서 좋았다. 소중한 우리 가족의 시간이 온전히 계획대로 되어서 기뻤다. 피자 배달이나 요청한 수리로 방문하시는 아파트 관리실 분들 이외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도 우리 집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날 찾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 가족만의 온전한 공간이 지켜지고 있어서 그 공간이 오롯이 감사했다. 필요할 때는 내가 나가면 되었다. 그리고 대중교통 대신 다 차로 움직일 수 있어서 그게 편했다. 당연히 여유 있게 주차할 수 있었다. 어딜 가든 주차 지옥이었던 서울을 생각하면 여긴 천국이었다. 어딜 가든 주차 자리는 넘치게 있었고, 주차 칸도 한국에 길들여진 내겐 아주 넓게 느껴졌다.


집 값은 말해 무엇하랴.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가시거리가 좁아서 마음도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빌딩 앞에 빌딩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그마저도 미세먼지로 어두워져, 깨끗하게 멀리 볼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상대적 스트레스를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이제 만연한 'ㅅㅂ 이제 모르겠다' 마인드를 백 번, 천 번 이해할 것만 같았다. 한국에 있는 내 교사 친구들은 다 출근을 시작했다. 온라인 개학이지만 교사는 학교에 나가야 한단다. 당연히 모든 공무원들은 쉰 적이 없다. 따라서 공무원을 상대로 하는 업종들도 당연히 쉰 적이 없다. 죽어도 일은 하러 나오라면서 나와 놀지는 말라니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또 실컷 잘 지켜놨더니 해외에서 들어간 사람들 한 두 명이 크게 물을 흐려 퍼트린다. 나라도 '에라이 이제 모르겠다.' 소리가 절로 나올 것만 같다.


이 곳은 그나마 집 값이 저렴하고 상대적으로 넓었다. 집도 넓고 가시거리도 넓었다. 물론 비싼 집은 여기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저렴한 주거를 찾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적어도 서울보다는 훨씬 선택의 여지가 많았다. 차를 타고 나가면 금방 시야가 넓어져서 좋았다. 어디든 산책로는 운동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조금만 나가도 사회적 거리를 얼마든지 지키고 걸을 수 있는 초록 초록한 숲 속이 마음껏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 곳은 아이들이 학교를 쉬면 교사들도 재택근무를 한다. 미국은 필수 업종이 아닌 경우는 문을 닫도록 하고 최소 사회적 지원금을 정부에서 제공한다. 그렇다고 이 곳 사람들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곳도 당연히 어렵고 힘들다. 실제로 훨씬 더 많은 분들이 바이러스와 싸우다 세상을 떠나셔야만 했다. 어느 국가가 더 잘 싸웠냐를 어느 국가가 더 경제적으로 어려웠냐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냥 눈치 보지 않고 재택근무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니 재택근무를 해야만 해서 다행이었다. 자연에서 숨 쉴 수 있는 너른 공간이 지척에 주워진다는 것이 내겐 큰 위로였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요소였다.


이 곳 교민들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정부 칭찬 일색이다. 외신들도 앞다투어 한국이 코비드 19에 대처한 방식을 이야기한다. 한국 정부가 위기 상황에 얼마나 친절하고 신속하게 잘 대응했는지 예찬하느라 입이 마른 줄 모른다. 안전한 한국으로 들어간 교민들은 집 앞에 박스로 도착한 '입국 선물 패키지' 인증 사진이 한창이다. 박스 안에는 마스크와 식료품 그리고 싱싱한 꽃까지 직접 받지 않은 내가 봐도 그 세심함이 정말 감동의 도가니다. 정부가 잘했는지, 의료진이 잘했는지,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대단한지, 배달 서비스가 훌륭한지 그 모두인지 모르지만 한국은 대단했다. 정말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어차피 집에 있을 거라면 나는 여기가 훨씬 쉬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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