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아 Aug 05. 2020

한쪽 귀가 갑자기 안 들린다.

#어느 날 갑자기 #돌발성 난청 #한쪽 귀가 안 들리니 #새롭게 들리는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는데 한쪽 귀가 안 들린다.


정말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는데 멀쩡하던 귀 한쪽이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잠이 덜 깼나 했다. 자고 일어나서 시야에 물건이 더디게 인식돼 듯, 오감각들이 제자리를 찾는데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한 쪽 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 날 뭘 했는지 돌아봤다. 특별할 것 없는 평일이었다. 갑자기 수영장에 가서 잠수를 한 것도 아니고, 어느 락 페스티벌에 가서 스피커 앞에서 신나게 놀다 온 것도 아니다. 그냥 그제처럼 어제도 아이들과 집에서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냈을 뿐이었다. 샤워하다 귀에 물이 엄청 들어갔나? 근데 내가 너무 둔해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을까,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이륙할 때 갑자기 기압 차로 귀가 먹먹해지듯 답답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온 몸이 비행기를 탄 것이 아니라 한쪽 고막만 비행기에 탑승했나 보다. 한쪽만 안 들리다니.


전화를 받는데 무심코 안 들리는 쪽으로 받았더니 소리가 매우 작게 들린다. 얼른 폰을 반대쪽으로 바꿔 들지 않았다면 폰 상태나 통신 상태를 의심할 뻔했다. 잘 들리는 귀를 손가락으로 꽉 막고 신랑 보고 작은 소리로 말을 해보라 했더니 정말 가족오락관에 '이심전심' 게임처럼 (이걸 아시는 분이라면... 옛날 사람 인증!) 입 모양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괜찮겠지, 이러다 말겠지'하며 하루를 보냈다. 한쪽은 잘 들리는데, 다른 한쪽은 잘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귀가 두 쪽이라 다행이다. 한쪽이라도 들려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양 쪽으로 들어오는 소리의 데시벨이 다르게 느껴지니 어지러웠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저녁이 되자 소리 크기의 차이는 더 심하게 느껴졌고, 어지러움에 토할 것 같아 겨우겨우 타이레놀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그제야 슬그머니 불안함에 겪고 있는 증상을 포털 창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찾아낸 병명은 '돌발성 난청'. 원인도 워낙 다양하고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치료도 쉽지 않다는 의견에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돌발성 난청은 대부분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치료에 대한 반응이나 예후가 다양한 만큼 원인은 다인성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돌발성 난청 환자의 1/3은 정상 청력을 되찾지만, 1/3은 부분적으로 회복하여 40-60dB 정도로 청력이 감소하며, 나머지 1/3은 청력을 완전히 잃는다. 처음에 생긴 난청이 심할수록, 어음 명료도가 떨어질수록, 어지럼증이 동반된 경우일수록, 치료가 늦은 경우일수록 회복률이 낮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렇게 높은 확률로 청력이 감소되거나 아예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니 무서웠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치료가 늦을수록 회복률이 낮다는 말에 당장 병원을 알아보았다. 한국이었으면 별다른 고민 없이 이비인후과로 달려갔을 터였다. 그런데 이 곳은 미국, 가장 빠른 진료 예약이 2주 후였다. 2주 후면 아예 귀가 안 들리기로 작정을 했던지, 저절로 나았던지 귀가 노선을 정하고도 남을 기간이 아닌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병원을 안 가고 집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나으면 다행이고, 영원히 안 들리면 어쩔 수 없고'라고 체념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 젊은 걸. 그리고 지금은 21세기, 세상 제일 잘났다는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가. 통탄스러웠다. 하지만 살인적이라는 미국의 병원비를 으레 들어와 알고 있었기에 각종 검사를 하고서 집으로 날아올 청구서는 병원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이미 두려웠다. 90세가 넘으신 우리 할머니는 한쪽 귀가 잘 안 들리셔서 항상 전화기를 붙잡고는 엄청 큰 소리로 대답하시는데, 이제야 할머니의 고충을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어지러우셨을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걱정이 된 신랑은 나를 놓아주며 오늘은 그냥 다른 방에 가서 혼자 방해 없이 자라고 했다. 사실 연년생 두 남매와 네 식구가 함께 엉켜서 자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피로함이 있었다. 더군다나 둘 째는 요새 이가 나려는지, 배가 아픈지, 성장통인지 그 유명한 원더 윅스인지 괴성을 지르며 새벽에 일어나곤 했다. 안아서 한참 어르고 달래지 않으면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 과정을 늘 함께 해왔던 터라 나의 피로함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베개를 들고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옆 방으로 건너왔다. 몇 년 만이었을까. 아이들과 완전히 떨어져 자본 것이. 첫 째가 태어난 이후로 단 하루도 혼자 자본 적이 없었으니 무려 3년이 넘었겠구나. 신랑이 요새 재택근무로 사무실로 쓰는 빈 방, 빈 침대에 혼자 누웠다. 처음엔 귀가 안 들려서 혼자 잔다는 사실도 잊고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느 좋은 호텔에라도 온 것 같았다. 혼자만의 공간이 이렇게 소중했었나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도 잠시, 혼자 침대에 있으니 너무 허전했다. 쓸쓸하고 외롭다가 심지어 조금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세상에 그 전엔 그렇게 혼자 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주어진 호사 아닌 호사엔 몸이 적응을 못했다.


달콤한 꿀 잠을 잤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귀는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응급실을 알아봤다. 멍하니 저절로 낫기만 기다리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고 한쪽 귀로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근처에 당일 예약으로 진료가 가능한 CVS의 minute clinic을 찾았다. 전문의는 아니셨지만 나름 청력 검사도 해보고 이것저것 들여다보시고, 문진 후 고막이 파열되었거나, 염증이 있거나 하는 물리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셨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질문은 "아이가 몇 살이냐?" 하셨고, 이제 돌 지난 아이와 두 돌 지난 아이가 있다는 대답에 같은 어린 아기 엄마였던 그 여의사 분은 내가 '잠은 제대로 자는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나의 생존에 관련된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는 신랑에게 '독박 육아병'인 것 같다 전하라며, 잘 먹고 잘 자고 며칠 좀 잘 쉬는 것이 좋겠다 하셨다. 술이나 담배를 물어보셔서, 솔직히 술을 거의 매일 마시고 있음을 고백했다. 육아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있었으니. 당장 술을 끊으라 하셨다. 덧붙여 갑자기 많이 어지러워지거나, 더 심각하게 완전히 한쪽이 안들 리거나 하면 즉시 ENT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아가라 했다. 아 그리고, 귀지 제거제를 처방해주셔서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귀지 제거액을 10불 주고 사 와야 했다.


어이없는 결론이었으나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병원에 가봐도 속 시원히 답도 없을 것 같았지만, 뭔가 속이 시원해진 이상한 만족스러움이었다. 그것은 '나는 지금 몹시 잘 쉬어야 한다'는 몸의 신호라는 것을 병원에서 증명해주신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 후 며칠을 더 당당하게 신랑의 사무실 방에서 혼자 잤다. 낮에 일도 하고 아이도 새벽에 안으며 잠도 설쳐야 하는 신랑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래도 어지러움은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안 들린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 어느 날 오후, 정말 다시 갑자기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체험이었다. 휴 정말 그 순간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안 들렸다. 마치 내 귀에 보이지 않는 무선 이어폰을 누군가 끼웠다 뺐다 하는 것처럼. 그것이 빠졌다가 다시 끼워졌다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아직도 조심, 또 조심하고 있다. 우선 술을 끊었다. 나는 애주가였는데 습관처럼 반주로 마시던 술을 아예 끊어버렸다. 임신 아니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건강보조제를 챙겨 먹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내 몸을 최우선 순위에 두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보다 먼저 엄마가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지속 가능한 건강한 육아를 할 수 있다. 얘들아, 이제 엄마 좀 쉬자.


느 날 갑자기 한쪽 귀가 들리지 않자 들리기 시작한 마음의 소리. "나는 지금 잘 쉬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이제 그만 폰을 내려놓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