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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Aug 27. 2020

페미니스트는 여성스러우면 안 되나요?

#낙태는 #여성의 권리? #페미니스트 #정체성 #혼란의 시기

한국에서 나는 자칭 페미니스트였다. 회사에서도 간혹 힘쓰는 일에 남자 직원들만 동원되면 절대 지지 않고 가서 의자 하나라도 더 옮겨야 직성이 풀렸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안 하는 일이 있거나,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분노하며 시스템을 고쳐 놓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가령 사무실 탕비실에 정수기 물통이 비워져 있으면 다른 여자 직원들은 '에고~ 물이 다 떨어졌네.'하고 누군가가 채워 줄 때까지 다른 곳의 정수기를 이용하거나 안 마시고 말았다. 옆에 뻔히 꽉 찬 새 물통이 있는데 말이다. 나는 그런 광경을 참을 수 없었다. 굳이 새 물통을 들어 올려 -물론 처음에는 서툴러서 옷이 다 젖고, 바닥에도 물이 흐르고 난리였지만- 내가 갈아내고야 말았다. 자꾸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꾸 우리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이사님이 나 같은 '젊은 여직원'을 시켜 커피를 내오라는 지시에는 인사고과의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티 나게 거부했다. 같은 대리급 남자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그 일을 부탁하곤 했다. '왜 젊은 여자가 커피를 타주어야 맛있다고 생각할까?' 회식 자리에서 당돌하게도 직접 여쭤봤더니, 그게 '보기에도 좋고,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된 것은 후천적인 교육의 힘인 걸까? 나는 심지어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 이사님은 무려 '교포'셔서 한국말이 서투시기까지 했는데, 한국에 오신지 10여 년 만에 한국 문화에 완벽 적응하시다 못해 내장 소프트웨어까지 조선식으로 갈아 치우신 모양이었다. 자기가 마실 커피는 자기가 타서 마시면 안 되는가. 아니 많이 양보해서 어른 공경 의미로, 젊은 직원들이 한다고 쳐도 거기에 왜 '젊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필터가 씌워지는 것일까. 세상은 많이 변했다고들 하지만, 내가 겪은 사회 속 실상은 글쎄... 아직도 멀었다 싶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보니 소위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강도가 한국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에서는 "왜 여자만 커피 타는 일을 하고, 탕비실 정리를 해야만 하나요. 왜 남자만 위험한 교통 안내 업무나 행사장 정리에 동원되나요. 산휴 육휴(출산 휴가 3개월+ 육아 휴직 12개월) 후의 승진 불이익 문제는 왜 아직 해결이 안 되나요." 같은 문제경험했다면, 미국에서는 이미 그런 문제를 애저녁에 뛰어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여성은 이제까지 여성들이 억압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며 피해자로서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한참 '인종 차별 문제'와 동시에 가장 핫한 이슈인 '성차별 문제'를 접하며, 나는 이 나라의 '쎈 언니'들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유튜브의 여러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집중하여 듣기 시작했다. 심지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8월 26일 미국의 'Women's Equality Day (여성 평등의 날)'이다. 코비드만 아니었으면 워싱턴 D.C.에서 있었을 거리 행진에 당당하게 함께 참여했을 터였다. 그리고 온갖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에 올렸겠지. 한참  멋진 운동에 빠져서 한국의 모든 '82년생 김지영'들과 함께 한국을 제대로 개혁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한국에 살며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인식하기 시작하니 너무나 폭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멈춰야 하고, 착취당해온 여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어떤 일을 얼마나 하던지, 남성들과 똑같은 (아니 조금 더 높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이에 더해 남성성이 가지는 파괴적인 성향은 사회의 악이 될 수 있으므로 초기에 차단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였다. 이들은 남성이 이제까지 누려온 특권 때문에 여성들이 약자로서 피해를 받았으므로,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 자체가 여전히 성차별이라 주장한다. 여성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리고, 남성이 더 많은 의무를 이행할 때, 비로소 올바른 성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여성의 가슴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맞서 싸우기 위해 브라를 하지 않는다. 노브라로, 숏컷 헤어로 거리를 활보하는 걸 크러쉬 언니들을 보며 (사실 이제 내 나이가 어리지 않아 이들이 나보다 언니는 아닐 수 있다. 다만 나보다 멋있으니 언니인 걸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권 운동이라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면 갈수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생겼다. 바로 한국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던 '낙태' 문제 부분.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는 부분에서 잠시 동의의 물개 박수를 멈췄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생명'에 대한 화두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뭐 생명 윤리고 뭐고 그런 도덕적 관념도 집어 다 치우고 단순히 생각했을 때에도 뭔가 여성으로서 억울했다. 주변에서 아기가 유산만 되어도 얼마나 여성의 몸이 상하는지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온갖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로 몸과 마음이 엉망진창, 정말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아기를 낳고 난 후의 몸조리를 하는 것 이상 제대로 몸을 챙기지 않으면 정말 몸이 다 망가지고 만다. 그런데 낙태라고 다를까. 아니 자연 유산은 자연적으로 약한 자궁 내 환경이나, 약한 아기가 사산되는 경우이지만, 자연적으로 강하게 살아남은 건강한 생명체를 자궁 안에서 찢어 죽여 꺼내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낙태가 합법화되는 것이 여성에게 이로운 것이 맞는 걸까?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는 것은 어떤 논리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생명은 자웅동체가 아닌 이상 아무도 혼자 만들 수 없다. 왜 생긴 아이에 대한 책임을 여성 혼자 져야만 한다는 말인가? 수술이 합법화되고, 남성이 경제적인 책임을 진다고 해도, 어쨌든 이것은 모두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 아닌가. 이 정신적 신체적 손실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일단 즐기고 어쩔 수 없어 생기면 지우면 된다는 논리를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성폭행 등으로 원하지 않는 아기를 가졌는데도, 억지로 여자 혼자 낳고 키우느라 한 여성의 인생이 통째로 말아먹어 지길 원한다는 말이 아니다. 첫째는 성폭행이 일어날 수 없도록 더 보안과 안전 문제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생명은 여자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함께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이 생기면 지우는 것이 답이 아니라 생각 없이 씨를 심은 자에게 함께 책임을 물기 위해 어떠한 사회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할 수는 없는가. 아무 생각 없이 생명을 만들고 책임을 지지 않는 남성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물리적 거세를 시키던지!)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할 일 아닌가. 왜 죄 없는 뱃속의 생명을 지우는 것에는 관대하면서, 죄지은 어른에게 죄를 묻는 것에는 이렇게 비싸게 구는 것일까. 고구마 100개를 먹은 듯 속이 답답해졌다.


그러고 보니, 숏컷 헤어에 노브라로 여성의 권리를 외치는 그 쎈 언니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굳이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삭발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속옷이 불편해서 벗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브래지어가 얼마나 덥고 불편한지 남자들은 절대 모르겠지. 하지만 물리적 불편함의 이유보다는 여성의 가슴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노브라로 시위를 한다는데 그것이 왜 더 불편하게 느껴질까. 남성들이 여성의 가슴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은 본능일까? 교육에 의한 것일까? 본능이라면 그 본능은 막아야만 하는 '악'한 것일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성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인 걸까. 남녀평등을 넘어서서 남녀를 이분법으로 나누기 시작하며 '남혐' '여혐'의 개념이 생겨나고, 나와 다른 성을 혐오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평등이 아니라 '여성 우월주의'를 가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여성의 존재 자체를 신체적, 지능적, 도덕적인 모든 면에서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로, 남성을 열등한 존재로 본다. 만약에 정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지능적인 존재라면 왜 더 하등 한 남성을 여성의 생존에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여성을 우위에 두고 여성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어느 부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여성은 늘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로 보호받아 왔던 것 아닐까. 재난 위기 상황에서 늘 구조는 어린이, 여성부터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남성이 구조되지 않는가.


오랜 민족의 역사에서 늘 남성은 전쟁에 나가 가정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워왔고, 여전히 경제적 능력이 없어 거리에 나앉는 보호받지 못하는 많은 수의 노숙자는 남성들이며, 여전히 신체적 위험도가 높은 직업군에는 남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미 남성들이 사회와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이해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직업군에서 더 많은 시간 일하고, 남성보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해야만 하는 임신 출산 육아의 가치를 더 사회적으로 높이 인정해주고 보호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많고,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에 많은 열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너무 혼란스럽다. 무엇이 정말 여성의 권리를 위한 일인가.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생물학적으로 다르다. 다르게 태어났고, 다르게 자라난다. 한쪽이 맞고 한쪽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 다름 자체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가. 그 다름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 조금 더 세상이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나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긴 생머리에 찰랑이는 스커트를 좋아하고, 늘씬하고 잘 가꿔진 굴곡 있는 내 몸이 좋다. 젖꼭지를 드러 내놓고 나를 성적 대상화하지 말라 외치기보다는 편한 캡 내장 브라티에 언뜻 드러나는 가슴 실루엣이 그 자체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든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내 고유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가치를 다 내려놓고, 가장 돈 되는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유리 천장을 깨고 남성들을 계급 체계 아래에 둘 때 그것만이 남성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며 주 양육자로서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이 사회에서 돈을 벌어 오는 역할을 하는 여성에게 못지않은 우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을 따뜻한 가정에서 온 정성을 다해 키워내고, 글을 쓰고 출간을 하며 자아 성취를 하고 있는 현재의 내가 좋다. 회사에서 쟁쟁한 남자 동료들을 제치고 혼자 승진을 했을 때의 기쁨이나, 회식에서 주량으로 남자 꼰대 상사를 눌러서 희열을 느꼈던 순간들보다 훨씬 기쁘다. 나는 여전히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세상과 싸우지만, 여성스러운 내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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