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치 #연애 좀 해라 #HSP #섬세한 사람들 #연애도 어려워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내 눈엔 아직 어리고 여린 고운 동생이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누나가 되어야 할 테니, 소개하자면 이미 사회에선 서른 중반의 아저씨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나뿐인 소중한 피붙이기에 늘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 팍팍한 시대에 직업도 있고, 집도 있고, 차도 있는 능력자다. 물론 자기 지분보다 은행 지분이 더 많은 것은 안 비밀. 몸도 마음도 바르고 건강하다. (누가 얘 좀 데려가실 분?)
동생은 굳이 분류하자면 초식남이다. (초식남: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섬세함을 지닌 남자를 지칭.) 초등학교 때부터 해오던 첼로를 취미지만 놓지 않아 가끔은 가족들에게 동호회 클래식 연주회를 들을 기회도 제공한다. 식물을 좋아하고 잘 키워 혼자 사는 아파트는 식물원처럼 초록 초록하다. 커피를 즐겨마시고, 헤어숍은 늦어도 두 달에 한 번 가서 스타일링을 한다. 딱 자기랑 맞는 실장님 아니면 머리를 맡기지 않는다. 그러다 7년이 넘게 만나는 헤어숍 실장님과는 절친이 되었다. 옷은 깔끔하고 댄디하게, 유행에 민감하다. 고가의 옷을 자주 사진 않지만 보는 눈과 센스가 있어 자기에게 어울리는 것을 정확히 찾아낼 줄 안다. 나서서 일을 맡지는 않지만, 이미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여 짐을 끊어두고 성실하게 다닌다. 짐에 못 갈 때는 마스크를 끼고 아파트 주변 공원을 달린다. 최근에는 골프에 맛 들여 열심히 스크린 골프를 치고, 연습장에 다니고 있다. 소수의 친구들을 깊이 있게 사귄다. 그의 친구 두 명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다. 징글징글한 인연이다.
내 폰에 동생의 이름은 '개복치'로 저장되어 있다. 미안해 개복치. 영혼이 쿠크다스 같은 그는 작은 충격에도 바사삭 부서지기 쉬운 여린 영혼의 소유자이다. 조금 더 전문적인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최근에 주목받는 'HSP'가 아닐까 한다. HSP란, 매우 예민한 사람(Highly Sensitive Person)의 약어로, 1995년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가 도입한 개념이다. 이들은 창의력이나 공감능력이 뛰어나지만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지치거나 좌절하는 단점도 있다. 아론에 따르면 인구의 15~20%가 이렇게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HSP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예민하고 같은 상황이라도 더 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대개 창의력이나 공감능력이 뛰어나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거나 타인을 더욱 배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쉽게 지치거나 좌절하고 정신건강이 나빠지기 쉬운 단점도 있다. 또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기 때문에, 본인의 작은 실수에도 크게 자책하며 결국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을 회피할 가능성이 있다. HSP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그런 동생에게는 어린 시절 6년 넘게 만났던 아가씨가 있었다. 그 아가씨와는 워낙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터라 이별 후 타격은 온 가족에게도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타격이 본인만 하랴. 개복치의 영혼을 지닌 동생에게 그녀와의 이별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가 되었다. 그 후로 다시 5년 여가 지났는데 아직도 동생은 독수공방,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다. 물론 아직 그 아가씨를 잊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다시 그 아가씨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상태가 나쁘지도 않은 사지 멀쩡한 애가 혼자 있으니 주변 불알친구들이며 가족들은 워낙 답답해했다. 하지만 동생은 굴하지 않았다. 소개팅을 하는 것도 마다 했다.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회사를 다니고 틈나면 운동을 하고, 음악을 감상하고, 맨날 만나는 그 불알친구들과 가끔은 여행도 가고, 인생을 평온하게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잔잔하고 평화로운 개복치의 일상의 호수에 커다란 돌 하나가 던져졌으니... 그것은 바로 소개팅! 들어오는 오천만 소개팅을 다 마다하던 그가, 웬일로 한 대학 동아리 선배의 부인의 친구라는 분과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사진을 쭉 보여주는데 '예뻤다.'.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구나. 생각하며 잘해보라 했다. 그런데 소개팅 후, 개복치가 그녀에게 훅 빠져들었다. 그녀는 그가 발견한 최초의 예쁜 HSP 여자 사람인 것 같았다. 자기와 너무 성향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렇게 진입장벽이 높던 그의 연애사에 처음으로 그가 먼저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발견한 것은 뭐랄까, 가족들에겐 기적 같았다.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어떤 가족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단 개복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면 어떻게든 그녀가 그의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부모님도 나도 얼른 그가 연애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연애에 있어 그리 능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썸 타는 기간이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 들이대다 차였다고 한다. 전해 들은 이야기라 어떻게 마음을 표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편지로 마음을 전했는데, 부담스럽다고 더 이상 연락을 못하겠다고 했다 한다. 그는 다시 꽤나 오랜 기간을 힘들어했다. 연애도 아니고 소개팅에서 썸이었던 그녀를 보내주는 과정이었는데도 그는 정말이지 많이 아파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가족들의 속은 타들어 갔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지난주, 소개팅을 주선했던 동아리 형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소개팅할래? 상대는 그때 그 아가씨." 동생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그 여자분도 동생 만만치 않은 개복치 영혼의 소유자인데, 그분은 동생이 너무 괜찮은 사람인데 자기가 빨리 마음에 대한 대답을 못해주어 썸 타는 관계를 질질 끌다가 나중에 'NO'를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동생을 위해 미리 거절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를 너무 배려하고 또 배려하다가 잘 안된 것 같다고 말이다.
이게 무슨 속 터지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럼 이제 다시 동생이 연락해서 만나보자 해보면 되는 것인데, 동생은 한 번 거절당했던 사람으로서 자기가 다시 연락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선자 형 이야기로는 그 여자분 역시 연락을 해보고 싶은데 자기가 거절을 했던 사람으로서 자기가 다시 연락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연락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전달받고 있는 개복치의 누나는 고구마 백개를 삼키고 있었다. 아니 연락해보고 아님 말면 될 것이지, 뭐가 이리 어렵단 말인가! (참고로 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나는 팔이 안으로 굽고 말았다. "하지 마라, 그 여자분 마음이 그렇다면 그분이 너한테 연락을 먼저 해주시면 좋겠네. 네가 다시 연락하고 또 개복치 모드로 기다리고 하는 거 못 보겠다." 전화를 끊고 나니, 신랑이 다가와서 말했다.
"나도 동생과 비슷한 성격인데요, 그걸 한 번은 내려놔야 결혼을 할 수 있더라고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도 그런 경험을 못해봤을 거예요. 내 생각엔 되든 안 되는 동생이 먼저 연락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 연애 인양 아이들을 재울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개복치 동생의 연애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동생이 제발 연애를 했으면 좋겠지만, 자존심 다 버리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것을 더 보고 있는 것이 안쓰럽고 힘들었다. 하지만 얼른 연애는 했으면 좋겠다. 그는 그렇게 며칠을 더 고민했다.
그는 고민 끝에 결국 먼저 용기 내어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간다.
(두근두근, 개복치의 연애사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후속 편 올릴게요. 동생이 알면 싫어하겠지만요 :) 원래 몰래 듣는 남의 연애사가 제일 재밌는 것 같아요. 섬세한 사람들, 연애도 참 쉽지 않네요. 카톡 한 줄에 무슨 생각이 이렇게나 많을까요? 진입 장벽이 이렇게나 높다고요. 공감되시나요? 사실 저는 정반대의 성격이라 안쓰럽고 답답해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지나쳐서 될 일도 안되게 생겼지 뭐예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저렇게나 힘들 일인가 이해도 안 돼요. 하지만 미혼 동생의 연애 이야기는 너무 재밌어요. 낄낄 전 아줌마니까요! 이렇게 동생을 브런치에 팔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