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같은 금요일, 칼퇴를 마치고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닭강정을 한 박스 사서 집으로 들어간다. 오자마자 옷도 안 갈아 입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찰나의 달콤한 휴식, 샤워를 마치고 나와 세상에서 제일 편한 극세사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닭강정이 식기 전에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컴퓨터 모니터에 틀어두고 냉장고에서 시원해진 맥주를 한 캔 꺼낸다. 벌컥벌컥 빈 속에 들이켠 시원한 맥주가 시원하게 목을 타고 넘어갈 즈음, 바삭한 닭강정 하나를 입에 넣는다. 지금 이 순간,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20대 중후반 한참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때는 원하는 시간에 잘 수 있었고, 자는 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폰 알람이 울릴 때까지 잘 수 있었다. 당연히 친구들과 약속을 정하면 원하는 시간에 만날 수도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셔도 다음 날 출근만 할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었다. 다음 내 끼니는 내가 먹고 싶은 대로 정할 수 있었다. 요리를 하여 밥을 먹을 수도, 배달 음식으로 때울 수도 있었다. 당연히 화장실 문을 닫고 마음 편히 볼 일을 볼 수도 있었다. 원하는 책을 내가 게으르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집중하여 읽어낼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마블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면 기다렸다가 개봉일에 맞추어 보는 소소한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주말에 1박 2일 여행을 갈지, 미술관을 갈지,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할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실지, 썸남을 만날지, 봉사 활동을 갈지 결정하는 것도 온전히 내 자유였다. 그런 주말이 매주 있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새삼 놀랍다. 평일 저녁과 주말 그리고 출퇴근 길까지, 그 길고 긴 자유 시간에 난 뭘 하고 살았던가 생각해보면 사실 기억도 잘 안 난다.
결혼 후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생기며, 나는 조금씩 여자에서 아내로, 아내보다는 엄마로서의 선택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얼큰한 닭볶음탕 국물에 소주 한 잔 하는 것이 큰 낙이었던 나는 입맛도 점차 바뀌어 갔다. 맥주는 취하기 전에 배가 불러 못 마시던 내가, 맥주 큰 거 한 캔이면 기분 좋은 취기를 느끼게 되었다. 불닭볶음면을 쿨피스 한 모금 없이 잘도 먹어대던 나였는데, 이젠 우유에 치즈까지 얹어 먹어도 속이 쓰렸다. 비냉만 찾던 내가 이제 물냉 국물 맛을 알게 되었고, 꼬리곰탕 국물도 간만 맞으면 양념장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주량도 입맛도 참 많이 바뀌었다.
술도 여행도 취미도, 심지어 경력도. 육아가 시작되며 포기해야 할 것은 참 많았다. 대부분 물리적인 시간과,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치화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반면에 육아를 하며 얻어지는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초능력 같은 것들 말이다! 무슨 헛소리냐 하실 테지만 내가 만약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능력이다. 물론 이 초능력은 영화 주인공들처럼 어느 순간 짠 하고 생기거나,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엄마가 된 후 지속적인 수련과 함께 그 능력들은 굳은살처럼 배어갔다. 수련하고 싶지 않아도 매일 강제 수련을 해야 했다.
짜잔 그렇게 세 가지 새로운 초능력이 생겼다. 멀티태스킹 능력과, 인내심 그리고 순간을 즐기는 능력이다.
첫 번째는 엄청난 멀티태스킹 능력이다.
첫째 딸이 엄마를 부른다. "엄마 쉬 해야 돼요!" 기저귀를 뗀다고 다 어른처럼 혼자 볼 일을 보진 않는다. 손이 닿지 않는 화장실 불을 켜주고, 볼 일을 본 후 뒤처리는 아직 엄마의 몫이다. 화장실에 따라가려는 동시에 우리 둘째는 정수기에 의자를 끌고 올라가서 물을 컵에 받으려 하고 있다. 물을 틀 줄은 알지만 끌 줄을 모른다. 그러니 물이 흘러 옷이 다 젖기 전에 달려가 물을 끄고 의자에서 아이를 내려놓지 않으면 대 참사가 일어난다. 한 편 옆에서는 파스타 소스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태우고 싶지 않다면 당장 소스를 저어주던지 급하면 가스 불이라도 낮춰야 한다. 불 옆에 아이가 있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상황이다. 게다가 좁은 부엌의 팬트리 문은 냉장고에 걸려 활짝 열리질 않는데, 팬트리 안의 키친타월을 꺼내 아이가 쏟은 물을 닦아줘야 옷이 젖지 않을 터였다. 내복을 다 적혀놓으면 새 옷을 꺼내러 1층 부엌부터 3층 침실까지 뛰어 올라가는 수고가 더해진다. (지금 사는 집은 좁고 높은 미국의 타운 홈이라 계단이 많다.) 당장 정수기 물을 끄고, 아이를 의자에서 끌어내린다. 자기가 계획한 정수기 물놀이가 저지당하자 바닥에 쓰러져 울기 시작한다. 만삭 임산부의 배는 팬트리 입구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새 키친타월을 꺼내 정수기에서 흐른 물을 닦고, 동시에 끓는 소스의 불을 낮춘다. 입으로는 첫째에게 '조금만 참아, 엄마 갈게!'를 외친다. 물 닦고 불 낮추고 의자 멀리 치우고 입으로는 슬픈 둘째를 달래며, 쉬가 급한 첫째가 있는 화장실로 달려간다. 보통 이런 상황은 높은 확률로 동시에 벌어진다.
잠시 아이들을 데리고 운전이라도 해야 하는 날이면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으로는 네비와 전방을 예의 주시하며 손으로 뽀로로 노래가 끊어지지 않도록 틀고, 동시에 적정 실내 기온을 맞추며 안전 운행을 하는 능력이 있지 않으면, 운전 중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물론 뱃속 아기 태교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가능하면 평화로운 마음으로 해내도록 한다. 하루 종일 요리, 육아, 빨래, 재택근무로 삼식이가 된 신랑까지 챙기려면 아이들이 눈을 떠서 움직이고 있는 한, 일의 우선순위를 마음속에 제대로 갖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무엇을 할지 또 그다음은 무엇을 할지 생각을 하며 움직이되 중요한 것, 기쁘게 한다.
두 번째는 참을 인 세 번, 인내심이다.
아이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아니, 사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러면서 나아지고 배운다. 사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읊조리며 이 모든 것이 곧 나아진다고 믿지 않으면 이 순간을 견디기 어렵다. 둘째는 야단을 쳐도, 어르고 달래도 정수기에 대한 관심이 쉬이 식지 않는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돌리면 물이 나오는 기계라니. 그 옆엔 늘 부글부글 끓는 무언가가 있으니 궁금하기 그지없다.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니 식탁 의자를 질질 끌어다 엄마 옆에 서서 다 만져보고 싶다. 놀 수 있는 조리 기구를 아래에다 꺼내 주고 "카운터 탑 위에는 불과 칼이 있어 위험하니 올라오면 안 된다." 단호하게 대응한다. 무한 반복이다. 열에 아홉은 "나도! 나도!"를 외치거나 눈물로 부엌 바닥을 적시며 서럽게 운다. 그러든지 말든지 안 되는 한계는 분명히 해줘야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다.
게다가 최근에 현관문을 자기 손으로 열 수 있게 된 아이는 계속 무단 탈주를 시도한다. 조용해서 보면 문을 열고 맨 발로 때론 심지어 바지도 안 입고, 진정 하의 실종의 패션으로 찻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아찔하다 정말. 높은 곳에 기어올라가는 것은 또 얼마나 재밌는지, 책상이며, 식탁, 세면대 그리고 책장까지 의자를 아슬아슬하게 디디고 기어 올라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경악하게 만든다. 책을 찢거나 펜으로 벽에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하는 것 정도는 약과다. 내 랩탑을 건드리거나, 폰을 가져다 애먼 곳에 카톡과 이메일을 보내 놓곤 한다. 때때로 숨겨둔 본연의 파괴 본능이 발동하여 고가의 전자 기기나 물건을 들고 도망칠 때 나는 눈물이 절로 난다. 정말 모든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이 아이는 지금 세상을 배우고 있는 과정이다. 습득할 때까지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소리 지르지 않겠다. 너그럽고 지혜로운 엄마가 되겠다.'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오전도 못 가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두 번째라 제법 인내심이 많이 길러졌다. 아니 많이 포기한 건가. 정말 당장 저지해야 할 것과, 그냥 두어도 될 것을 많이 구분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이젠 참 많이도 내려놓았다.
세 번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능력, 바로 지금 현재 매 순간을 즐기는 능력이다.
혼자 해외여행도, 국내 여행도 마음만 먹으면 훌쩍 잘 떠나는 나였는데 이제 그런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길게는 반나절, 짧게는 하루 30분 정도라도 신랑이 내 영혼의 쉼을 위한 혼자의 시간을 선물해주곤 한다. 귀하게 주어진 시간을 대충 쓸 수는 없었다. 밥 한 끼를 먹어도, 샤워를 해도 아니 볼 일을 보는 찰나의 시간이라도 만약 문을 닫고 혼자 할 수 있다면 정말 온전히 그 시간을 즐겼다. 라면이 식어 불어 터지기 전에 한 그릇을 온전히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기회는 매끼 주어지지 않았기에 먹을 수 있을 때 진짜 맛있게 먹는다. 적당히 뜨거운 국물과 불지 않은 꼬들한 면발과 후루룩 입 안으로 들어오는 면발의 소리까지 즐긴다. 냄비를 들고 국물을 넘길 때 그 따스함까지. 아주 귀한 음식을 먹듯이 오감을 다 써가며 라면 한 그릇을 즐긴다. 어느 유명한 미슐랭 식당의 고오급진 음식을 먹어도 이보다 더 맛있게 즐길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장을 보러 혼자 나갈 기회가 주어지면 그 또한 몹시 설레는 나들이가 되었다. 출퇴근 운전이 왜 지겨웠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아할 지경이다. 운전을 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나를 위해 즐길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 시차를 고려하여 가능하면 한국, 불가능하면 미국에 있는 친구들 중 수다를 떨 수 있는 단 한 명을 골라 차에 올라타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마트를 갈 때 못다 한 수다를 실컷 떨고 안부를 묻는다. 돌아올 때는 듣고 싶었던 유튜브, 팟캐스트 그도 아니면 아기 상어랑 뽀로로, 디즈니 말고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온 진심을 다해 따라 했다. 짧은 드라이브 길일지라도 그건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 드라이브가 되곤 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면 깊이 숨을 들이쉬며 찰나의 행복에 젖었다.
무엇을 하더라도 훨씬 더 집중력이 높아졌다. 혼자 있는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아무렇지 않게 때론 지루하게 느꼈던 일상의 순간들도 집중하여 하나하나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에 집중하여 하나의 일을 의도대로 끝내고 나면 그 사소하고도 분명한 성취감에 작은 희열을 느꼈다. 삶은 유한하다. 생명체인 우리 모두에겐 남은 삶의 기한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끝이 있기에 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언젠가는 지금 누리는 기쁨도, 부도, 명예도, 슬픔도, 어려움도 다 지나가리라. 하루는 길지만, 돌아보면 일 년은 짧았다. 아이들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 다르게 자랐다. 꼬물대는 이 생명체들이 자라나는 이 시기가, 그리고 찰나일지라도 혼자 즐기는 이 시간이 언제 다시 주어질지 모르기에, 주어진 동안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산다. 그렇게 오늘도 조금 더 농도 짙은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