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8시 38분, 귀가길 왼쪽 상단에 적혀있는 숫자다.
쫓기듯 먹은 점심, 대충 집히는 대로 컴퓨터 앞에서 먹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저녁 식사. 오늘 하루 보험사에 전화할 10분의 여유조차 없이 보냈다.
컴퓨터 중앙 왼편에 쭉 늘어있는 오늘의 할 일과 주간 할 일에 'O'를 친다는 것이 한글 자판으로 'ㅐ'를 쳐버렸다. 주간 태스크를 다섯 개쯤 지우고 나서야 자판이 한글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냅뒀다.
할 일들이 쌓여있는데 왼쪽 눈 위가 떨리기 시작하며 느껴지는 극심한 권태감에 사무실에서 나와버렸다. 마치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서 지하철 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켰다.
5월 초여름 계절감을 느끼고자 설정한 나무들이 우거진 초록 배경화면. 자세히 보니 나뭇잎들이 제각각 다른 색이구나. 새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구나. 하루에도 수십 번을 여닫는 잠금화면을 여름이 다 지난 지금에서야 살펴보는구나.
그리고 숲의 저 멀리에 호수가 보였다.
호수... 저 멀리에 고요한 호수.
이 숲 사이를 빠져나가서 저 호수에 가고 싶었다. 내가 우러러보던 곳들이 저 건너에 있다. 그 고요함에 한 걸음 다가간 것만 같은데도 여전히 나는 여기에 있구나.
호수의 윤슬에 비친 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나. 물결에 일렁이는 입꼬리는 도무지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 알 수 없구나.
호수를 건너면서 생기는 파동에 두 팔을 우스꽝스럽게 허우적대겠지. 내가 만들어낸 파동인 줄도 모르고 강을 호수로 착각했다며 양팔을 벌려 손을 휘적이겠지.
그래도 괜찮다.
스스로 만든 물장구에 휩쓸리더라도, 잔잔함과 비견되는 높은 파도가 마음속을 쓸어가도 괜찮다. 호수 근처에 못 갔어도 괜찮다. 숲의 우거짐을 더욱 자세히 보면 된다.
호수 앞에 다가서니 막상 두렵고 겁이 나도 괜찮다. 그래도 여기 앞까지 왔으니까.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괜찮다. 그간의 것들이 씻겨 나가니까.
수십 번 물을 먹고 눈이 충혈된 상태로 겨우 호수를 건넜는데 도착지가 생각과 다른 곳이어도 괜찮다. 모든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냈으니까. 끝까지 스스로 선택함에 내가 경험한 것이니까.
결과가 어떠해도, 그 무엇이라도 괜찮다.
잔잔해 보이기만 하던 호수 속에 잠겨버릴지라도 괜찮다. 내 입꼬리는 더 이상 일렁이지 않고 위로 향할 거니까
웃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