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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Jan 11. 2023

캔디크러쉬와 12월 31일

임신하고서는 핸드폰 게임을 그렇게 해댔다. 태교라는 것을 하면 좋았겠지만,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떨쳐내야 아기와 교감하든지 말든지 할 일이었다. 출산휴가에 들어가자 회사 스트레스가 없는 대신 출산 준비에 마음이 바빠졌다. 아기 맞을 준비가 다 되었는지 체크리스트를 자꾸 확인했고 리스트를 내려놓고 뒤돌아설 참이면 새로운 불안이 발목을 잡았다. 사부작사부작 계속 뭘 한다고 완벽한 예비 엄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영속적인 안정감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말초적인 즐거움을 쫓는 게임이 출산 예정일까지 남은 시간을 소비해 버리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출산 휴가 중에는 특히 캔디 크러쉬에 반쯤 미쳐있었다. 다들 캔디 크러쉬를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아마 약 10년 전쯤에 말이다. 안타깝게도 (동시에 자랑스럽게도) 나는 2012년 캔디 크러쉬가 출시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에서는 일종의 퀘스트를 달성하면 부스터 아이템을 30분 혹은 1시간 동안 쓸 수 있는 보상이 주어진다. 이 부스터는 특히 어려운 레벨(눈이 시뻘건 해골바가지가 그러져 있다.)에 도달했을 때 아주 유용하다. 게임을 하도 하다 보니 나는 그 퀘스트가 달성되는 시점과 어려운 레벨에 도달하는 시점을 잘 조절해서, 해골 레벨에 도달하기 직전에 퀘스트의 보상을 얻어내는 요령이 생겼다. 그러면 몇 번이고 목숨을 잃어가며 해골 레벨에 패배하지 않고 부스터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음 레벨로 갈 수 있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바로 연승 기록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시도에 레벨을 통과하면 보상으로 아이템 선물이 주어진다. 패하지 않고 이 승리를 이어나가면 아이템 선물이 배가 되어 쏟아진다. 나는 그렇게 연승을 이어갔고 계속 선물을 받았고 그 선물을 놓칠 수가 없어서 또 연승을 하기 위해 아이템을 쓰며 게임에 집중했고…. 이런 게 게임에 조종당한 건가? 아니라고 본다. 이래 봬도 10년 동안 현금 결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디 이력서에 넣을 순 없지만 현재 나의 레벨은 5921이고, 1389개의 골드바를 보유하고 있다.


임신 중에 새로 빠져버린 게임은 바로 러스티 레이크라는 방탈출 게임이다. 게임 플레이어는 한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탐정으로 게임에 임하게 된다. 탐정인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방에 갇혀있고 여기를 탈출하는 것이 시리즈의 시작이다. 시리즈는 방대한 등장인물과 거대한 세계관으로 10편이 넘는데, 탐정이 나오는 편을 제외하고는 단순한 방탈출 게임이 아니다. 러스티 레이크 세계관에는 어떤 가문이 나오고 그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게임의 퍼즐을 풀다 보면 그 가문의 기괴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캐릭터가 죽는 것은 허다하고 과거를 바꾸기 위해 타인의 기억 혹은 신체의 일부를 수집해 알 수 없는 의식을 치른다. 임신 중에 했다고 하기에 그리 자랑스러운 내용들은 아니다. 하지만 게임의 스토리 라인이 복잡한 만큼 모든 시리즈를 완료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는데 당시에 난 이 쾌감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 게임을 해보라고 종용했고 남편은 취향에도 맞지 않는 기괴한 게임을 임신한 아내를 위해 플레이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나만큼 추리력이 좋지 않았으며 러스티 레이크의 음침한 분위기에 취약했다. 게임 중에는 급기야 실제로 방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다는 증상을 호소했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나의 게임 메이트가 되어 줄 수 없냐고 투덜댔다. 돌이켜보니 이 게임에 집착한 것이 뱃속 아가들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그리 떳떳하진 못 하다.


한동안은 캔디 크러쉬도 잠잠했다. 출산 후 틈이 나면 드러누워 눈 붙이기 바빴고, 나머지 시간엔 항상 할 일이 있었다. 우울했다는 건 아니다. 잠시 누우면 그날 찍은 아가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기 바빠서 게임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그러다 요즘 다시 게임에 빠지려 한다. 오랜만에 캔디 크러쉬 앱에 접속하니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면서 폭죽을 터뜨려준다. 눈앞에서 사탕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동안 게임에 매달리던 시기들을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그리 달콤한 순간들은 아니었다. 아마도 레벨 1000을 넘긴 것은 당시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쯤일 거다. 혼자 사는 외로움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던 날에 레벨 2000을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불면증으로 잠 못 들던 수많은 밤에 캔디 크러쉬를 켰었다.


연말이 되자 남편과 둘이 집중 육아에 돌입했다. 시터님은 아이 어린이집이 일주일 동안 방학이라 댁에 계셔야 했다. 우리 아가들은 여전히 통잠을 자지 못 해 나는 언제나 수면 부족이다. 누군가를 초대해 연말 분위기를 내볼까 싶다가도, 하루 양치 세 번도 간신히 하는 마당에 남편과 둘만 있는 게 맘이 편한 것이 사실이다. 아이 데리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한 아이는 낮잠 잘 시간이고, 한 아이는 곧 맘마 먹을 시간이다. 어차피 날이 추워 나가는 건 무리였다고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분명 카카오톡으로 친구들과 연락도 주고받고 남편과도 하루종일 붙어 있는데. 연말이라 분주한 세상과 고립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하지만 육아의 고충은 속 시원하게 털어놓기가 망설여진다. 아기들이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아? 그래도 독박이 아니고 남편과 공동 육아를 하고 있잖아? 몇 가지 질문에 자문자답 하다 보면 힘들다 소리가 새어 나올 수도 없다. 쓸쓸한 순간마다 누군가를 찾을 수도 없기에 캔디 크러쉬 레벨만 끝도 없이 높아진다. 


2022년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시점에 캔디 크러쉬에서 4시간 무제한 하트를 주었다. 오늘이 12월 31일이구나. 밤 10시가 넘어서야 실감했다. 새해가 얼마 안 남았다. 연말이라 느끼는 이 우울감도 이제 곧 사라질 거다. 새해 카운트다운은 하지 못 하고 잠들거라 자정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도 못 나누겠네. 무제한 하트를 즐기기엔,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돌리기엔 눈꺼풀도 너무 무겁다.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캔디 크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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