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렌지 쟈스민입니다. 우리는 올해 유난히 힘든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식물들의 입지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를 아껴주던 부부가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 건강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남아 계실 여러분들이 이 시기를 잘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고자 더 늦기 전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부부는 올해 4월에 약 3주간 집을 비웠습니다. 집을 비운 와중에도 남자는 주말에 와서 우리에게 물도 주었지요. 하지만 문제는 집에 돌아온 이후였습니다. 그들은 작은 인간 둘과 함께 돌아왔고 여자는 거동도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낮에 자기도 하고 밤에 깨어있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울기도 많이 울고 아파서 끙끙대기도 했지요. 그 와중에 우리에게 물 주는 것을 일주일, 이 주일이 넘게 잊었습니다. 이 부부와 함께 지낸 지도 수년째. 작은 인간 둘로 인해 힘들다는 것쯤은 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여린 포인세티아에게는 그들의 무관심이 치명적이었습니다.
2019년 겨울, 포인세티아는 부부 친구의 손에 들려 이 집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개화한 빨간 꽃이 참 고왔지요. 하나 그는 4월 몇 주간의 목마름으로 대부분의 가지를 잃었습니다. 이후에 부부가 정신 차리고 물을 주긴 했지만 그에겐 너무 늦었던 걸까요. 포인세티아는 작은 인간 둘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입었고 현재는 새끼손톱만 한 이파리 대여섯 개만 달려있습니다. 부부가 분갈이도 하지 않아 처음 그대로 모종에 심겨있는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하얀 화분에 심어져 있는 산세비에리아는 남자의 부모님 집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부 집으로 온 후에 풍성하게 새 잎을 틔울 정도로 적응을 잘했던 그도 현재는 상태가 위독합니다. 그는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식물입니다. 최근 날씨가 어땠나요. 한파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추우니 동파 방지 잘하라고 관리사무소에서도 수차례 방송했지요. 하지만 부부는 산세비에리아를 베란다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우리의 산세비에리아는 영하의 날씨에 냉해를 입고 지금 생사를 헤매고 있습니다. 부부는 몇 밤을 보낸 뒤에야 그가 위독함을 알아차리고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냉해로 축 처진 잎사귀를 모두 잘라내니 거의 뿌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의 뿌리는 내년 봄에는 다시 잎을 틔울 수 있을까요?
여자의 할머니 집에서 온 인도고무나무 셋은 비교적 잘 버텨주고 계십니다. 새 잎이 나려고 돌돌 말려있던 봉우리가 겨울이 되자 입을 꽉 다물어 버리긴 했지만요. 늦게 오신 분들은 모르겠지만, 할머니 집에서 올 때는 하나의 화분이었던 고무나무를 부부가 가지치기와 삽목을 해서 세 개의 화분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이토록 식물 돌보기에 열심히였던 그들인데. 부디 본인들의 행동에 책임을 느끼고 남은 겨울도 고무나무 가족이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조치해 주기를 바라봅니다.
저 오렌지 쟈스민은 약 5년 전 떡갈고무나무와 함께 이 집에 왔답니다. 부부는 양재동 꽃 시장에서 저와 떡갈고무나무를 데려왔지요. 떡갈고무나무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키는 부부보다 컸고 나무줄기도 여자의 팔뚝보다 굵었어요. 이 집을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 같았달까요. 작은 인간 둘이 오면서 화분들이 거실에서 차가운 베란다로 옮겨질 때에도 떡갈고무나무만은 거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죠. 하지만 작은 인간 둘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시작하자 떡갈고무나무에게도 위기가 왔습니다. 부부는 작은 인간들이 화분에 부딪힐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떡갈고무나무의 사이즈를 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뒤…. 그는 마침내 우리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부부의 말을 들어보니 어느 회사가 사무실에 놓으려고 구입했다 하더군요. 부부도 많이 아쉬워했지만 저는 정말 슬펐습니다. 양재동에서 낯선 아파트 신혼집으로 왔을 때부터 많은 의지가 되었던 식물이었는데…. 눈물을 보여 죄송합니다.
한때는 저도 하얀 꽃을 여러 번 피웠지요. 제가 꽃을 피우면 쟈스민향이 집안에 가득하다며 여자가 좋아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따뜻한 햇볕과 물을 좋아하는 식물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물 주기도 여러 번 거르고 추운 베란다에 저를 두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꽃을 피우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산세비에리아의 냉해를 계기로 부부는 저를 방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 방에서는 작은 인간 중 하나가 낮잠을 자지요. 작은 인간이 잠에서 깨서 울면 여자는 그를 들어 올려 달래줍니다. 어느 날은 그를 안고 달래주다가 저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작은 화분에 불과하지만 저를 ‘나무’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가들보다 더 오랫동안 부부와 함께한 사이라고도 했고요. 부부는 지난 8개월간 우리를 홀대했지만 함께한 시간까지 영영 잊은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우리는 더 살만해지겠지요. 비단 날씨가 따뜻해져서만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며 작은 인간들도 중간 인간으로 커질 것이고 그들은 부부의 가족인 만큼 저희를 아낄 것이라 확신합니다. 새근새근 낮잠 자는 작은 인간을 보면서 생긴 이상한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이 믿음을 뿌리 속에 간직해 보길 부탁드려 봅니다. 그 믿음이 희망이 되고, 희망이 영양분이 되어 나중엔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다시 뽐낼 수 있을 겁니다. 중간 사이즈 인간과 인사를 나누는 날도 기대해 보자고요.
참, 추가로 부부도 언젠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길 바라봅니다. 거실이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