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업’이라는 단어는 참 재밌다. ‘등급’이라는 단어와 ‘업그레이드’라는 영어 단어를 합쳐 ‘등급 업그레이드’라는 단어를 만들고 이를 ‘등업’으로 줄여서 사용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함께 이 단어의 역사도 오래되어서 그런지 용법도 다양하다. 등업되다와 같이 자동사로도 사용되고, 등업시키다와 같이 타동사로도 사용된다. 이 묘하지만 자연스러운 등업이라는 단어가 최근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얼마 전 나는 어떤 카페를 알게 되었고 등업 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매달려 댓글을 달았으며, 그 카페의 영향으로 수십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출해 버린 것이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되짚어 본다.
내가 거액을 들여 구입한 것은 바로 아기들이 볼 전집이었다. 아가들이 보는 그림책은 단행본으로 한 권씩 판매도 하지만 어린이 서적 전문 출판사들은 여러 권의 책을 구성해 전집으로도 판매하고 있다. 고가의 전집들은 ‘다중 지능이론’이라는 유명한 이론에 기반해서 책을 구성했다고 홍보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인간의 지능이 언어, 논리수학, 공간, 신체운동, 음악 등 8가지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이다. 일단 다중 지능이론까지 알고 나면 참 골치 아파진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아이의 지능이 8가지 분야 모두 고르게 발달할 수 있도록 꼭 전집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빠지기 때문이다. 나도 다중 지능이론을 접하자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아니 8가지 지능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모른척할 수 있냔 말이다. 언어만 챙겨주고 수학을 안 챙기면 어떻게 하냐구. 다행히도 고민은 며칠 만에 해결되었다. 유명 전집 3 대장 중 한 곳에서 때마침 블랙프라이데이 할인을 한다는 정보를 얻고는 홀라당 사버린 것이다. 집으로 30권이 넘는 그림책과 각종 블록, 교구가 여러 개의 박스에 실려 택배로 도착했다. 자, 아가들아! 이제 엄마와 함께 언어, 수학, 공간, 신체, 음악, 개인, 대인관계, 자연 8가지 분야를 다채롭게 탐험해 볼까? 마음이 벅차올라 물었지만 아가들은 대답이 없었다.
며칠 만에 거액의 돈으로 책을 사버리는 용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전집병에 걸리기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나는 인터넷 검색 중에 어떤 카페를 알게 되었다. 어린이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공구도 진행하며, 육아에서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카페 사람들은 자녀에게 노출해 줄 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유명한 전집 시리즈들은 ‘등업’과 같이 줄임말로 불리고 있어 처음엔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도 못했다. 돌이 채 안 된 아기들이 보는 책들도 너무 많았다. 아이가 7개월이 될 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다. 부리나케 카페 글들을 정독했다. 카페 엄마들이 많이 읽는 육아서도 도서관에서 빌렸다. 책에서는 아이들의 문해력이 장기적으로 사고력 향상과 지식 습득에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독서가 제일 중요한 건데! 이 카페를 알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난 더 많은 글을 읽고 정보를 얻고 싶었다. 등업을 해야 했다. 카페 규정상 가입 후 최초의 등업을 하려면 30자 이상의 댓글을 30개 이상 적어야 했다. 30자 이상의 댓글 30개. 오케이. 나는 모든 온라인 활동을 접고 등업에 올인했다.
30자 이상의 댓글을 쓰려면 최소 3개 문장은 되어야 했다. 세 문장 이상의 할 말이 생기려면 내 관심사와 겹치는 글이어야 했다. 아무 글에나 30자 이상의 댓글을 달 수는 없었다. 카페를 매일 시시각각 들락거렸고 새 글 알람도 걸어놨다. 글들을 꼼꼼히 읽고 내가 댓글을 달만 한 내용이 있을지 살펴보았다. 카페에 잠복하며 이 행위를 몇 백번 하니 30개의 댓글을 달성할 수 있었다. 댓글에는 글쓴이에게 경험담을 남겨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글에 관련해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질문이나 고민을 남겼다. 그 사이에 나는 유아 서적에 진심이 되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과 같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극찬하는 전집을 나도 꼭 들이리라 다짐하였다. 소리 없이 카페 중독이 되어버린 나를 보며 남편은 종종 걱정스레 물었다. “또 카페 봐…?” 당연하지, 나 인터넷으로 하는 게 카페 활동밖에 없는데? 나는 약 20여 일 만에 등업에 성공했다. 이제 다음 등급으로 가려면 200자 이상의 게시글 7개에 댓글 150개다.
카페에서 열띠게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아이의 영어 교육이다. 비싼 영어유치원이나 학원 대신 집에서 영어책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어 교육에도 전집이 있다. 물론 영어 전집도 비싸다. 영어 전집이 비싼 이유는 아마도 음원 때문이었다. 영어 책을 노래로 읽어주며 흥미를 갖도록 되어 있었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발화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영어 전집을 내는 출판사들은 아이들이 강사와 영어로 놀 수 있는 센터도 운영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카페 사람들은 영어 전집 구입을 한 번쯤은 고민하는 것 같았고, 영어 훈련을 위해 센터도 많이 다니고 있었다. 전집을 살 때의 열정으로 영어 관련된 글들을 정독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유명한 영어 전집 중 한 곳의 홈페이지에 방문했다. 전집 커리큘럼과 센터 운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는데 나를 사로잡은 메뉴가 하나 있었다. 바로 ‘가맹점 문의’였다.
영어 유치원을 보내지 않아도 다들 자녀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어느 정도의 비용을 투자할 의향이 있다면, 이거 꽤 돈 되는 사업 아닌가? 나 나름 현재 일종의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고, 다양한 연령대 학생들에게 영어 과외도 꽤 했으니 가맹점 하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맹점 문의’ 페이지에 들어가니 간단한 신청 폼이 나왔다.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몇 가지 설문에 응하자 카카오톡으로 자료가 왔다. 영유아 영어 교육 시장의 현황을 시작으로, 회사 소개, 최근 5개년 가맹점들의 매출, 우수 가맹점 지사장들의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일단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만 많이 벌면 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크고 작은 행사도 개최해 봤고 고객들도 많이 상대했으니 지점 운영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갑자기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휴직 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대안이 생겼다.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들뜬 마음은 딱 1시간 정도 지속되고 허무하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강사들만 강의하는 게 아니라 지사장도 아이들에게 영어로 수업하고 놀아주는 ‘액터’(그 브랜드에서 사용하는 용어다.)가 되어야 했다. 양손에 인형을 끼고 여러 개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수업하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안 되겠다. 난 평범한 내향형 사무직이다. 강사 관리, 수업 운영, 고객 상대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인형극 수업에는 능력치가 하나도 없다. 지점 블로그에 올라온 강사 및 지사장들은 사진을 보니 파워 외향인의 포스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속할 곳이 아니었다. 잠재적 직장 후보 하나가 그렇게 사라졌다.
잠시 뜨거운 광기가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등업 광기, 전집 광기, 영어 교육 광기 그리고 가맹점 개설 광기까지. 와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진로 고민은 나도 당황스럽다. 광기 뒤에는 불안이 숨어있었다. 아기들에게 못 해주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남들이 아는 만큼 알고, 하는 만큼 하려고 카페를 떠나지 못했다. 육아휴직 급여가 어떻게 책정되는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수령해 보니 생활에 빠듯한 느낌이다. 육아로도 이미 버겁지만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딘가 허전하고 불안하다. 바삐 정보를 수집하고 책을 사 모으는 건 내 불안을 잠재우는 데에는 도움이 된 것 같긴 하다. 아가들의 다중 지능 발달에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광기의 끝에 남은 건 약간의 위안 그리고 카드 청구서뿐이지만 그 여정은 즐거웠다. 새벽에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잠깐 깼을 때 카페 알람이 떠있으면 반가웠다. 내 카페 글에 정성 어린 30자 이상의 댓글을 달아준 이들에게 고맙다. 비록 그것이 등업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고마운 마음은 변함없다. 등업을 위한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기에. 어딘가에서 눈에 불을 켜고 댓글을 달고 있을 당신. 당신의 등업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