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나누는 대화의 마무리는 항상 같다. "아기들 사진 좀 찍어서 보내라.” 손주가 너무 보고 싶은 외할머니이지만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 매일같이 아가들 사진만 기다린다. 이왕이면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내서 손주를 보러 오면 연착된 애정이 한꺼번에 도착한다. 이름 불러주랴, 눈 맞추랴, 뽀뽀해 주랴, 안아주랴 엄마는 쉴 틈이 없다. 맘마 안 먹겠다고 뻐팅기는 아기를 내가 더 먹이려 들면 엄마는 아기에게 말한다. “에구, 누가 그래쪄? 먹기 싫다는데 누가 그랬어요?” 누구긴요, 엄마. 나잖아요…. 아가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너무 속상한 나머지 내가 무안해지는 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한두 달 만에 엄마를 만나면 처음엔 밀린 수다를 떠느라 즐겁다. 엄마가 아가 편을 들어도, 내 생활 습관을 바꾸려 해도 기분 좋게 설명할 수 있다. 아가가 지금 안 먹으면 목욕하기 전에 너무 배고파져서 그래요. 낮에 아가들 잘 때 나도 틈틈이 자다 보니 역류성 식도염이 생겨서 밥을 많이씩 못 먹어요. 그러다 하루 이틀 지내면, 난 별로 가열하지도 않았는데 내용물을 쏟아내는 양은 냄비처럼 엄마의 멋모르는 간섭에 짜증이 왈칵 난다. 엄마는 고작 한 두 마디 했을 뿐이다. 가족 간에는 끓는점이 100도씨보다 훨씬 낮은지 조금만 가열해도 순식간에 끓어오른다. 그래 놓고 짜증 낸 것이 미안해져서 애정을 과하게 표시하며 보상하려 한다.
비록 짜증과 애정이라는 양가적 감정 사이를 우스꽝스럽게 오가긴 해도, 엄마를 향한 나의 감정은 항상 애정으로 회귀한다. 무서웠던 아빠와 달리 엄마는 언제나 다정했다. 집에 있는 유선전화로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너네 엄마 목소리가 탤런트 같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따뜻하고, 게다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어릴 적엔 엄마들 사이에서 지점토 공예가 유행이었다. 엄마는 국수처럼 길게 빚은 점토로 바구니를 땋았고 그 위에 포도알과 잎사귀 장식을 붙였다. 잘 말려 색을 입히고 니스 칠을 하면 포도넝쿨이 드리워진 바구니가 완성되었다. 만두피처럼 얇게 편 점토로는 하늘하늘한 장미꽃도 피워냈다. 내 잘못으로 지점토의 장식이 떨어져도 엄마에게 혼난 기억은 없다. 험한 말이나 행동은 엄마의 것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교우 관계도 학업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모났을 때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어보니 엄마가 반찬으로 조기를 싸주었다. 엄마는 조기 뼈와 가시를 다 발라내고 생선 살만 담았다. 친구들 앞에서 순간 창피해졌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엄마가 생선 살을 발라주다니. 부산에 산 지 몇 년 되었지만 사투리는 입에 붙질 않았고 혼자 서울말을 쓰다 보니 어딘가 곱상한 샌님이라는 시선이 있었다. 조롱 어린 시선을 떨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생선 살만 발라진 반찬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음에도 그날은 엄마에게 분이 났다. 수많은 엉뚱한 이유로 모난 말을 엄마에게 내뱉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와는 부딪힌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면 이유는 하나다. 엄마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엄마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했다면, 이젠 엄마가 나에게 이것저것 간섭한다. 평소에 챙겨주지 못한다고 한 번 만나면 이 음식 먹어보라, 이 옷 입어봐라 끈질기게 권유한다. 여기에 출산하고 나니 손주들에 대한 코멘트도 추가되었다. 엄마의 화장법도 달라진 지 오래다. 내가 보기엔 눈 화장이 너무 진한 것 같다. 엄마는 진한 스모키 색상으로 눈 주변을 넓게 칠한 뒤 눈썹 뼈 바로 아래에는 하이라이트를 준다. 나는 화장을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라 화려해진 엄마의 화장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자꾸 다른 화장 스타일을 권했지만 절대 바뀌지 않았다. 엄마가 이렇게 어려웠던가? 수수하고 어딘가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엄마의 모습은 지점토 바구니만큼이나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변화는 아빠의 부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빠가 시작한 사업을 이끌어가셨다. 아빠가 없다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엄마가 답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히려 일을 정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빠 퇴직금과 대출금이 들어갔기에 쉽게 접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생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엄마는 그렇게 타지에서 자영업 사장이 되었다. 직원이 20명 정도 되는 작은 공장이지만 납기와 품질 관리가 중요했다. 초반의 고생 끝에 엄마가 운영하는 공장은 좋은 품질을 여러 번 인정받았고, 대다수 직원들이 창업 당시부터 올해로 14년째 근속하고 있다. 엄마가 공장 내 골치 아픈 일을 토로할 때면 나는 회사 생활 좀 해봤다고 아는 체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내 조언은 필요 없었다. 많은 문제에 있어서 엄마의 대응이 옳았다. 엄마의 화장이 개성 있어진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강한 가부장이 존재하는 가정 안에서 나타난 자비로운 엄마의 모습을 사랑했다. 아빠의 부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는 자유를 주었지만 엄마에게는 큰 슬픔이고 고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난이 엄마를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있던 엄마의 모습이 변화된 환경으로 인해 드러났다. 엄마는 원래부터 사업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때 나에게 보여준 모습만이 그녀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베풀기만 하는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 존재가 낯선 모습을 보여도 난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엄마와 같이 있을 때 내가 얼마나 쉽게 양은 냄비로 변해버리는지를 보면 아무래도 받은 만큼 베풀 수 있는 깜냥은 없지 싶다.
난 아기들에게 한없이 포용적이고 따뜻한 존재로 남아있을 자신이 없다. 아가들이 말하고 떼쓰기 시작하면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이상한 엄마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능한 오랜 시간 동안 아가들에게 납작한 존재로 보이고 싶다. 한결같이 너그럽기만 한 엄마로. 아가들도 나에게선 쉬운 사랑만 경험하면 좋겠다. 인내하고 내주어야 하는 어려운 사랑은 나중에 누군가와 많이 하게 될 테니.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나의 날 선 말에도 엄마는 여전히 싫은 소리는 하지 않는다. 내가 취업과 동시에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첫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많은 말을 속으로 삼켰을까. 엄마가 삼키지 않는 말들은 고작 가벼운 간섭임에도 나는 자꾸 발끈한다. 매일 반성하지만, 받기만 하는 쉬운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엄마가 삼키지 않는 말들로 인해 엄마를 조금이나마 더 완전하게 알게 되어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