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쓰던 2G 핸드폰에서는 문자메시지 수신함에 용량이 정해져 있었다. 수신함이 꽉 차면 더 이상 문자를 받을 수 없어서 수신함을 한 번씩 비워야 했다. 전체 선택 후 지우면 간단할 일이지만 지우고 싶지 않은 문자가 꼭 있기 마련이었다. 좋아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문자는 언제고 다시 열어보고 싶기에 수신함을 비울 때에도 문자메시지를 하나씩 열어가며 남겨둘 메시지를 고르고 골랐다. 수신함 가장 아래쪽에는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은 문자 메시지들이 소복소복 쌓였다.
출산이 임박해서는 물건을 엄청 갖다 버렸다. 아가들을 위한 물건들을 놓아야 하는데 우리 집은 ‘저장 공간 부족’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 아빠 물건이 정신없이 꽉 차 있는 집에서 아가들을 맞고 싶지 않았다. 식구가 둘에서 넷으로 늘어나는 것이니 못 해도 기존 살림살이의 절반은 없애야 했다. 서재 방을 아기방으로 정하고 제일 먼저 책과 CD들을 처분했다. 책은 소장할 몇 권만 빼고는 중고서점에 팔았다. 남편이 결혼하면서 가져온 CD 중엔 영영 안 들을 것 같은 90년대 댄스 가수의 앨범도 있었지만 묘하게 책 보다 처분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엔 인디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된 밴드들의 앨범도 많았다.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절반 정도는 남겨두었다. 내가 대학생 때 쓰던 펜탁스 ME Super 필름 카메라도 버리지 않았다. 1980년대 생산된 제품으로 내가 2006년에 중고로 구매했으니 우리 집에서 연식도 제일 오래된 물건일 거다. 필름 카메라를 쓰지 않은지 십 년도 넘었지만,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인화하는 설렘의 기억 때문에 이 카메라는 문자 수신함 제일 밑에 있는 100번째 메시지가 되었다.
옷장도 열어젖혔다. 몇 해 동안 입지 않았지만 버리지 않던 옷들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안 어울리지만 언젠가 시도하고 싶어서 버리지 못하거나, 주고 산 가격이 아까워서 몇 번이라도 더 입으려고 버리지 못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옷들을 입을 ‘언젠가 그날’ 보다 아가들이 세상에 나올 날이 더 빨랐다. 더 이상 내 옷장에 남아 있을 명분이 없어진 옷들이 쭉 빠지고 옷장엔 빈 옷걸이만 헐겁게 덜렁거렸다. 주방 수납장에서는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과 냄비를 꺼내 버렸다. 곳곳에 수납된 여기저기서 받은 기념품, 오래된 안경테, 선글라스도 버리고 약상자도 싹 정리했다. 화장대 서랍도 탈탈 비웠다. 의외의 복병은 냉장고였다. 외면하고 있던 오래된 식재료들이 줄줄이 나왔다. 포장을 뜯지 않은 고추장도 나왔는데 유통기한이 2016년까지였다. 다행히 펜탁스 필름 카메라보다 오래된 건은 없었다. 8킬로에 달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나자 집은 마침내 ‘수신 가능’ 상태가 되었다.
육아용품들은 거의 중고거래로 구입했다. 대부분 사용기간이 짧아 제값 주고 사기 아깝기도 하고, 장난감처럼 취향을 타는 물건은 아무리 국민템이라고 해도 아가들에 따라 거들떠도 안 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몰랐는데 중고시장에서 육아용품을 사는 것은 매우 치열했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은 매물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거래가 완료되었다. 빠른 판단력으로 예약이라도 걸어놔야 원하는 물건을 제때 살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우물쭈물하는 쫄보였다는 거다.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과 달리 당근마켓에서는 판매자에게 말을 걸기가 조심스러웠다. ‘상태는 좋지만 중고제품이니 예민 맘은 피해 주세요.’ ‘찔러보기 사양합니다.’와 같은 문구를 붙여놓은 판매자를 보면 더 말 걸기 어려웠다. 안녕하세요, 재 당근이라고 하셨는데 물건 생산연도를 알 수 있을까요…. 송구하지만 하자 있는 부분 사진을 추가로 보내주실 수 있으실지요…. 세탁 비용이 들 것 같은데 5천 원만 빼주실 수 있을까요…. 당근마켓에 갓 입문한 초보 거래자는 대화에 자꾸 말 줄임표를 쓰고 있었다. 공짜로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돈 주고 사는 것인데도 왜 이렇게 극진해지는지. 내 중고거래 페르소나는 좀처럼 소심했다. 결국 중고거래는 남편이 담당하기로 했다. 남편은 적당히 건조한 어투로 제품 상태도 확인하고 에누리도 잘 받아냈다. (안 깎아주면 그만이었다.) 그러고도 매너 온도는 잘만 올라가더라.
출산하고 한동안은 바쁜 육아에 갇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벚꽃도 여름 장마도 가을 하늘도 모두 창문 너머의 일이었다. 계절이 세 번째 바뀌고 분유만 먹던 아기들이 어느덧 앉아서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다. 신생아 때 쓰던 물건들은 쓸모를 다했고 새로 들여야 하는 물건들은 부피가 더 커졌다. 안 쓰게 된 것들을 다시 정리해야 될 시기가 왔다. 먼저 아기침대와 작별을 고했다. 딸랑이도, 아기 욕조도, 바운서도 처분했다. 아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누워서 보던 모빌도 거실 한쪽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모빌도 당근에 올려야겠지요?” 우리 집 당근마켓 담당자 a.k.a. 남편에게 말을 꺼냈지만 속마음은 진짜로 팔아야 될지 묻는 의문문이었다. 모빌까지 이제는 보내야 되는 걸까. 아기 옷도, 손 싸개, 발 싸개도 무료 나눔으로 잘만 보냈는데 모빌에서 마음이 찡해지는 것은 뭐람.
아가 눈에 보이는지 알 수 없어도 집에 온 첫날부터 항상 틀어놨던 모빌이었다. 모빌을 보는 건지 허공을 보는 건지 한참을 긴가민가하다가 처음으로 아가들이 모빌에 시선을 고정하고 쳐다보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 지금 모빌 따라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눈도 잘 못 뜨던 아가들이 모빌을 보다니! 그럼 나도 보이겠네! 누군진 몰라도 매일같이 안아주고 맘마 주는 나도 보이는 거지, 그렇지? 아가들이 커가면서 모빌 흑백 인형을 색깔이 있는 인형으로 하나씩 바꾸어 달아 줄 때쯤엔 집에 알록달록한 벽보를 사다 붙였다. 색을 구별할 줄 안다니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과일, 동물, 식물들이 그려져 있고 명칭이 한글과 영어로 쓰여있지만, 뭘 배우기보다는 다채로운 색깔을 구경하길 바랐다. 내가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육아의 쳇바퀴에 갇힌 것처럼 느끼던 그 영원 같던 시간 동안 아가들은 모빌을 보고 또 봤다. 모빌은 새것같이 깨끗해도 짙은 시간의 흔적이 내 눈에는 보였다. 모빌을 보며 재밌는지 꺅 소리도 지르고, 잡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이. 너무 힘들었지만 벌써 그리운 우리 아가들의 모습이.
감상에 젖긴 했지만 모빌도 결국 팔았다. 올리자마자 7명에게 채팅이 왔고 제일 먼저 연락 온 사람이 몇 시간 뒤에 바로 가져갔다. 갓 부모가 된 그들이 아가에게 모빌을 보여주며 언제 나를 향해 웃어줄까 올망졸망 아기를 쳐다보고 있을 모습이 그려진다. 아가들은 한참 동안 쳐다봤어도 모빌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엄마 아빠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게 분명하다. 모빌을 보내고 나니 중고거래에 잠시 주춤해졌다. 아기 옷 몇 개는 나눔 하지 말고 남겨둘까 싶어졌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보관할 수 있을까. 아마도 소중한 기억들이 너무 많아지면 더 이상 보관에 연연하지 않을 것 같다. 흐르는 찰나를 붙들고 살 수는 없다. 아가들 이쁜 모습 하나하나를 모두 꼭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집에 빈자리를 많이 만들어 놔야 한다. 아가들이 조금만 더 크면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모으게 될 테니까. 내가 버리지 못하는 필름 카메라나 남편이 남겨둔 CD처럼 말이다. 유치원 끝나고 오는 길에 낙엽이 이쁘다고 주워오고 돌멩이랑 대화하다 집에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 엉뚱하고 쓸모없는 소중한 것들도 아가들이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내 것을 비우는 연습을 오늘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