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정산 입력 기간이다. 세금을 돌려받을 기대감과 함께 작년엔 돈을 얼마나 썼을까 씁쓸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정보는 물론 의료비이다. 몸에 탈이 없다면 안 써도 될 돈이다. 눈을 질끈 감고 국세청 홈페이지에 로그인한다. 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버튼을 클릭. 2022년 의료비 지출은 660만 원!
포탈 검색창에 항공권 가격을 검색한다. 다음 달 출발하는 인천-로마 왕복 항공권이 넉넉잡아 250만 원이다. 부킹닷컴 앱에 로마 호텔을 검색해 본다. 4성급 호텔에서 일주일간 묵는다고 필터를 설정해 봐도 200만 원이 안 넘는다. 의료비를 이만큼 쓰지 않았다면 로마를 다녀왔겠구나 생각해 본다. 참, 그런데 아까 검색한 항공권은 일반석 기준이다. 5시간이 넘는 비행 시 일반석에 앉을 수 없음을 이미 수년 전에 스스로에게 선포했다. 오래 앉아 있는 자세는 퇴행성 디스크와 척추측만증, 거북목이 있는 나에게는 최악의 자세이다. 고관절을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에 둘 수 없다.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앉은 상태로 허리가 혹사당하고 나면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정형외과를 찾을지도 모른다. 거기서도 도수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든다. 아니면 침이라도 맞을 수 있게 한인이 운영하는 한의원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래도 나한텐 침보단 도수치료가 더 잘 맞는데. 여기까지 상상해도 벌써 한국이 그리워진다.
호텔도 4성급이면 괜찮으려나. 나에게 중요한 건 침대다. 침대 매트리스가 제대로 몸의 하중을 지탱해 주지 않으면 자면서 근육 어딘가가 긴장되기 마련이다. 나는 이미 앞으로 말린 어깨(라운드 숄더)로 인해 견갑골도 들려있고 등 근육은 견갑골을 제자리에 붙들기 위해 과하게 긴장되어 있다. 마치 내가 등 근육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근육이랄 것도 없기에 그냥 내 체형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안타까운 나의 체형 때문에 추가적인 긴장 요소가 발생하면 몸 컨디션은 끝장이다. 더군다나 내 일자목은 아무 베개나 대충 베고 자면 통증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경추를 C자 형태로 유지시켜 줄 경추베개가 필수다. 나는 엄마 집에 갈 때도 내가 쓰는 베개를 캐리어에 넣고 가야 하는데, 환경이 낯선 도시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을 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5성급 호텔을 가니 특수 베개가 필요한 고객을 위해 메모리폼 베개를 비롯해 약 서너 종의 베개를 구비하고 있어 이용한 적이 있다. 난 4성급으로는 로마에서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베개를 챙겨가고 수하물 비용을 더 내는 수밖에.
어쩌저찌 여행 기간 중에 컨디션을 잘 유지하고 왔다고 치자. 1년 휴가가 20일 전후라고 해도, 애초에 휴가는 몸이 아파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휴가를 여행에 몰빵하기는 어렵다. 도저히 눈이 안 떠지고 못 일어날 것 같은 수많은 날들을 위해 휴가를 아껴놔야 한다. 더군다나 신혼여행 아니고서야 개인 휴가로 열흘씩 사용하는 것도 한국 직장인 정서에 맞지 않는다. 평일 5일에 앞뒤로 주말을 붙인 9일이 최대치이다. 고관절 고생을 하며 유럽까지 갔는데 부랴부랴 일찍 돌아오긴 아까우니 로마에서 토요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일요일에 인천에 도착한다. 다음날 바로 출근이다. 돌아오자마자 시차도 적응해야 하고 여독도 풀고 출근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여행의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다음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신 출근해 줄 사람도 없다. 여행의 기억으로 행복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며칠 뒤에 몸살이 나서 수액 맞으러 가지 않으면 선방이다.
660만 원이라는 숫자를 보고 돈이 아까워 잠시 속이 쓰렸다. 상상 속 로마 여행이 고난의 행군이 되지 않으려면 왕복 비즈니스석 항공권과 5성급 호텔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660만 원은 금방 훌쩍 넘는다. 그래, 한 해 동안 내가 쓴 의료비는 사회에 속해 밥 벌어먹고 살게 해주는 최소한의 비용이다. 의료비는 잘못이 없다. 그 돈을 쓴 나는 결백하다. 애초에 약한 몸의 사람은 약한 채로 살면 안 되는 것인가. 체력을 최대치로 끌어다 쓰게 살게 하는 이 사회가 문제다. 나 평균이하의 체력을 보유한 봉급생활자로서, 자본주의 사회에 유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급여의 3%가 넘는 금액을 의료비로 지출했으니 세금은 예정대로 환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