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엔 아픈 게 싫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죽을 먹는 것도, 부모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도 좋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대우가 달라졌다. 유행하는 눈병에라도 걸리면 옆 반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나도 뉴스에 나오는 그 유행병에 걸려서 2반 누구, 4반 누구와 더불어 이름이 회자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태어나서 골골대기를 10년 넘게 하니, 내 몸의 어딘가가 치명적으로 좋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소설을 읽더라도 어딘가 아픈 가련한 등장인물을 동경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처럼 나도 사소한 계기가 발단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위해 혈액을 채취하였다. 검사 결과에는 근심해야 할 내용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무슨 병명이 쓰여있을까. 묘하게 기대감에 부풀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난 빈혈조차 없이 모든 항목에서 정상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남들과 똑같은 검사지를 믿을 수 없었다.
‘오직 서류상으로만 건강한’ 몸으로 살면서 불편한 것은 늘어만 갔다. 체력장 하는 날에는 수치심이 폭발했다. 오래 달리기는 반에서 제일 오래 달렸다. 오래 달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리가 풀린 채 개구호흡하며 헐떡이는 행색이 문제였다. 달리기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숨이 찼지만, 먼저 들어와 쉬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가쁜 숨이 금방 잦아든 척했다. 부끄러움도 본능이었다. 토할 것처럼 힘들지만 숨을 참고 조금씩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내 얕은 체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즐겨보던 TV 프로인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서는, 넓은 초원에서 사냥하는 맹수의 모습이 자주 나왔다. 사자가 얼룩말 무리를 쫓지만 눈치 빠른 얼룩말들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사자는 이리저리 무리를 몰아 지치게 하는 전략을 쓴다. 결국 사자는 마지막에 뒤처진 얼룩말 한 마리를 물고 늘어지는 데 성공하고 애처로운 얼룩말은 사자의 든든한 식사가 된다. 그 사자의 사냥감이 바로 나일 터였다. 오래 달리기처럼 누군가에게 쫓겨 죽도록 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난 어김없이 잡힐 것이다. 사자에게 잡혀 멀어져 가는 무리를 바라보는 그 한 마리의 얼룩말이 꼭 내 마음을 울렸다. 약한 몸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은 어릴 적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이가 들수록 아프다고 걱정해 주는 사람은 점점 줄었다. 내 체력은 갑자기 잡혀버린 마라톤 회의나 뜻하지 않은 감정노동으로도 금세 동나버리는 수준이라, 정확히 금요일 퇴근 후부터 아프고 월요일이 되면 회복되는 스케줄을 따를 수 없다. 다른 팀원들과 똑같은 업무 일정을 소화하고 혼자 병이 날 때는 정말 난감하다. 갑작스레 휴가를 쓰고 쉴라치면 회신해야 하는 이메일, 보고할 안건, 제출 요청받은 자료들을 이불 삼아 덮고 누워야 한다. 쉬는 게 영 쉬는 게 아니다. 어디가 크게 아파서 입원하고 병가라도 쓰면 조금 더 당당할 수 있을 텐데. 자주 아프니 양치기 소년이 된 것 같다. 몸 약한 사람의 진짜 비애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검사지에 정상이라는 말만 있어 실망했던 중학교 1학년의 나는, 현 39세의 나이에는 몇 가지 병명이 있는 질환을 보유하고 있다. 피부질환, 정신질환, 척추질환.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티는 안 나지만 잔잔하게 고통을 주는 종류들이다. 이 질환 외에도 단순 감기, 몸살, 생리통, 생리 전 증후군 등으로 쉴 새 없이 아프며 살아간다. 멀쩡해 보이지만 하루하루 컨디션을 방어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서러움이 있다. 출퇴근이 오래 매달리기이고, 인간관계가 윗몸일으키기, 장거리 출장은 오래 달리기이다. 허약한 인간은 매일 철인 3종 경기를 치른다. 보는 사람은 스릴이 없지만 참가자만 숨 막히는 경기. 체력 vs 나. 그 처절한 경기를 기록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