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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Feb 09. 2023

비염, 내 인생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유행하는 히트곡처럼 반짝 나를 거쳐갔던 질병들도 많지만, 몇몇 질병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재생되고 있었다. 난 비염인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마치 내가 O형 인간인 것과 같은 맥락인, 나에 대한 의학적 정보이다. 내 혈액형이 바뀔 리 없듯이 내가 비염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회에 나와보니 혈액형이 O형인 사람을 만나는 빈도만큼 비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봤지만, 어떤 무리에서도 훌쩍이는 코를 가진 사람은 주로 나였다.


본인이 비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환절기가 되면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흐른다. 언젠가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의사가 알레르기성 비염이라고 했다는 경우도 많다. 비염의 스펙트럼은 얼마나 넓기에 이런 증상의 사람들과 나를 같은 집단으로 분류하는 걸까. 마치 투르크메니스탄 국적의 사람과 대한민국 국적의 나를 아시아인이라는 헐거운 기준을 적용해 동질 집단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든다. 심지어 동아시아도 아니고 그냥 아시아로 묶인 사이. 내가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비염인이라고 하면, 자고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거기에 알레르기약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데, 약이 가리지 않고 고루고루 안 드는 것이 맹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곧이어 재채기를 연이어 하다가 쉴 새 없이 코를 풀던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언제쯤인 것 같다. 한번 코에 발동이 걸리면 콧물을 멈추기란 쉽지 않아서 등교 후 집에 돌아와 뜨끈한 물로 샤워라도 해야 간신히 멈추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 신체와 함께 비염도 성장했는지 이후 20대까지는 비염의 정점을 경험했다. 나에게 편의점에서 파는 휴대용 티슈는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조용한 수업 시간에 팽하고 코를 시원하게 풀 수 없었다. 팽 한 번에 끝날 일도 아니었기에 코로 휴지를 막고 얼른 쉬는 시간이 되어 화장실 가서 이 콧물과 단판을 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가장 곤욕스러울 때는 모의고사 볼 때였는데 컴퓨터 사인펜과 연필, 지우개, 빨간 볼펜 정도만을 남기고 책상 위를 비워두어야 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휴지 뭉텅이도 올려두어야 했다. 커닝하려는 속셈으로 보일까 봐 차라리 빨리 감독 선생님이 내 휴지를 발견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아이 콘택트를 시도하곤 했다. 나는 결백하다는, 아니 가엽게 봐달라는 텔레파시를 발산하며.


나에게 비염이 없었다면 수리영역에서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학하는 대학교나 학과도 달랐을 것이고 내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염과 함께 대학에 진학했다. 먼저 진정한 비염인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의 코는 한여름 에어컨에도 쉽게 예민해졌다. 학교 강의장 에어컨은 내 마음대로 풍량, 풍향을 조절할 수도 없었고 여름의 강의장 공기를 식히기 위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강의장 에어컨에 쌓인 먼지 때문인지 냉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인위적으로 서늘해진 공기가 내 코 안의 점막에 닿으면 연거푸 재채기가 나왔다. 에어컨 바람을 피해 옷을 껴입어도 소용없다. 공격은 언제나 예리하게 빈틈을 파고들었으니까. 패션 상 어쩔 수 없이 드러난 발목 같은 곳도 주요 공격지였다. 신경 써서 발목 양말을 신으면 뭐 하나. 내가 조금이라도 근사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비염이 모두 앗아가고 있는데. 왜 코를 흘리면 세련될 수 없는 것일까. 비염으로 인한 이 수치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은 콧물을 흘리지 않는다. 꽃가루가 날려 알레르기가 발생하기 좋은 봄에도, 건조한 겨울이나 가을에도 그들의 세상에 비염은 없다. 추운 날씨에 옷을 얇게 입어도 재채기가 나지 않는다. 너무 많이 코를 풀어서 코피가 흐르는 주인공에게 누군가 휴지를 건네면서 로맨스가 시작될 수 없는 걸까. 장르가 코미디가 아닌 이상 코를 시원하게 푸는 장면은 좀처럼 볼 수 없다. 내 인생의 장르는 분명 코미디가 아닌데 누굴 즐겁게 하려고 비염이 내 삶에 찾아왔을까. 졸린 알레르기 약과 씨름하는 날도 많기에 코미디라 해도 재밌는 일이 별로 없었다. 주인공은 자고로 화면 가운데 위치해야 하지만, 신호가 오면 코를 풀러 잠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디든 문 가까운 쪽이 편한 것도 사실이다. 이 정도면 내 삶의 주인은 콧물이 아닐까 싶어 진다. 비염으로 오는 수치심은 콧물에 자아를 박탈당하고 주체적 삶을 갖지 못한 것에 기인함이 틀림없다.


탄압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처방은 나에게 옷을 겹겹이 아주 많이 입히는 것이었다. 비염이 없고 기관지도 건강한 엄마는 아마도 내가 추워서 콧물을 흘린다고 여긴 것 같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건만 당시의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시절 언젠가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의사가 청진기를 댈 수 있도록 간호사가 내 옷을 끄집어내는데 내 안에서는 옷이 계속 나왔다. 맨살을 만날 때까지 내 옷을 뒤적이던 간호사 선생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옷이 또 있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나는 진료 후에 옷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뭉텅이로 대충 넣어버렸다. 당시엔 좀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 웃음을 이해한다. 마트료시카도 아니고 그게 뭐람.


단순 알레르기약이나 코감기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자 고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의사는 내 코 점막이 매우 예민하니 점막을 지지는 시술을 해서 코가 자극을 덜 받게 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심정이야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엄마가 가격을 비롯해 추가적인 설명을 어쩌고 저쩌고 듣고 난 뒤 어쩐지 우리는 약만 받아서 집에 왔다. 역시 가족이어도 모르는 거다. 조마조마하게 코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나의 24시간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나의 경우엔 예민해진 점막이 점액을 만들어내고 이게 목뒤로 넘어가기도 하니 헛기침을 자주 했다. 집에는 아빠가 먹는 용각산이 상비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아빠가 나에게도 용각산을 권하기 시작했다. 동그란 은빛 상자에 한자가 새겨져 있고 가루에서는 맛없는 냄새가 나는 약. 꼭 담배를 많이 피우는 할아버지가 먹을 것 같은 약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한 스푼씩 입에 털어 넣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지만, 내 후두에서는 성실히도 분비물을 만들어 냈기에 용각산으로 잠재운 헛기침은 오래지 않아 재발하기 십상이었다.


헛기침과의 추억도 있다. 대학생 시절 강의장을 찾아가는데 먼저 강의장에 도착한 친구가 내가 올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복도에서 익숙한 내 헛기침 소리가 나서 내가 오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고 했다. 찬란한 20대 청춘이 헛기침 소리 따위로 기억되다니. 나 무의식 중에 얼마나 헛기침을 해댄 거지. 같은 수업 듣는 사람들은 모두 헛기침의 근원지로 나를 인식하고 있을까. 친구는 아무런 판단이나 평가가 없이 천진난만하게 추리의 근거를 이야기했지만 난 머쓱해 침이 꼴깍 넘어갔다. 코의 지배를 받는 사람에게는 그걸 모른 척해주는 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라는 걸 비(非)비염인은 헤아릴 수 없다.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흐르는 모습, 목을 가다듬는 모습은 자신의 여러 모습 중 가장 보이기 싫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빨간 머리를 홍당무라 놀리는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리친 앤을 이해한다. 난 예민한 기관지를 석판으로 내리치고 싶은 적은 많아도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칠 일은 없었던 것은 다행이다.



내가 비염으로부터 삶의 주체성을 탈환하게 해 준 건 마포구 어느 병원에서 처방한 작은 항히스타민제였다. 그동안에도 항히스타민제를 비롯해 코를 마르게 하는 다양한 약을 먹었건만 20대 후반 찾은 어느 이비인후과에서 나는 비염과 극적으로 휴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새로 문을 연 그 이비인후과에서는 젊은 의사가 진료를 보고 있었고 나에게 알레르기 검사를 권했다. 알레르기 검사한 지 오래되었으니 다시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였다. 검사 결과는 집 먼지 진드기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정도의 평범한 수준이었고 의사는 약 1정을 하루 두 번 먹도록 2주 치 처방했다. 이번엔 제대로 적중했다. 이상하게 이 약은 잘 들었다. 약을 몇 번 처방받아먹으니 약이 없어도 몇 달씩 괜찮았다. 의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성분으로 다른 제약회사에서 만든 항히스타민제가 여럿 있을 텐데 꼭 '그' 병원에서 처방하는 '그' 약만 든다는 걸 들으면 말이다. 이후에도 병원을 찾으면, 의사는 같은 약을 오래 먹었으니 다른 약으로 주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바뀐 약도 항상 잘 들었다. 미신 같은 이야기지만 어떤 신비로운 기운으로 난 그곳에서 약을 처방받아야만 이 긴 싸움을 종료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의 장난에 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상관없다. 이제는 그 병원까지 가려면 1시간이 넘는 곳으로 이사 갔지만 병원이 폐업하지 않는 이상 난 그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비염은 이렇게 나를 떠난 것일까. 지리하게 이어진 싸움 끝에 허무하게 갈라서는 연인처럼 내 인생 모든 챕터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한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옷 주머니마다 여분의 티슈를 챙기며 매 순간 전투태세를 갖추던 날들이 과거가 되는 걸 보면 비염은 내가 상대해야 하는 질병 중 난이도 최하, 입문자용 기초 편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나를 오랜 시간 괴롭힌 것에 비하면 그 끝은 좀 시시하다. 최첨단 시술이나 비밀스러운 민간요법도 아닌 평범한 알레르기 약으로 종말을 고하고 있으니.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는 노랫말처럼 비염이 자리를 내주자 허전할 틈도 없이 내 삶은 다른 질병들로 메꾸어지고 있다. 이제는 잊을 만하면 흥얼거리게 되는 추억의 팝송처럼 다른 일로 골골대다 간혹 코를 훌쩍이는 것으로 그 자취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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