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좋은 식재료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곳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절기마다 보양식을 챙겨 먹은 기억도 딱히 없다. 한약도 그러했다. 몸은 약했지만 의외로 그 어떤 보조 없이 생긴 대로 흐물흐물하게 컸다. 나와 달리 친구들은 성장기에 한약을 한 번씩은 먹는 것 같았다. 부모나 조부모가 보약을 지어주었다며 학교에 한약 봉다리를 한 포 씩 가지고 오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그 음료가 도대체 뭐길래 친구들은 인상을 쓰고 코를 막으면서 그렇게 먹는 걸까. 신기했지만 부러웠던 적은 없다. 당시에는.
환경적으로 한약을 가까이할 요소는 전혀 없었지만 나는 이제 자발적으로 한약을 찾는 어른이 되었다. 내 신체조건을 보면 이렇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나에게 아플 일은 많았다. 환절기의 기온차, 몰아치는 야근과 출장, 심지어 무리한 여행이나 유흥까지도. 휴가를 내고 쉬거나, 그래도 회복이 안 되면 링거를 맞으러 병원을 찾거나, 홍삼 같은 것을 챙겨 먹는 등 그때그때 필요한 처방을 스스로에게 하는 편이지만, 내 치트키는 한약이 되었다. 사실 결정적으로 한약을 지어먹는 것에 맛 들리 게 된 계기는 나의 흑역사와 맞물려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한창 격무에 시달리던 20대 때 만난 한의대생이 바로 그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나는 당시 국내 어느 기업에 입사한 신입 사원이었고 그는 한방 대학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 중이었다. 회사는 매일 같이 야근 아니면 회식이었다. 연구소가 있는 다른 도시로의 출장도 잦아 그때마다 무거운 노트북을 이고 지고 기차에 올랐다. 연구소 미팅이 끝나면 그곳에서도 회식이 이어졌다. 한 번은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 적도 있었다. 원래 계획이 그러했는데 막내인 나에게까지 친절히 알려줄 필요가 없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회식은 기차 시간을 훌쩍 넘겨 끝났고 나는 어느 여자 차장님 집에 가서 자라고 배치되었다. 정장과 구두, 피곤과 술기운을 훌훌 벗어버리고 개운하게 자도 피곤할 일정인데 그날은 남의 집 바닥 전기장판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 날에도 미팅은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제대로 감기 몸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쩡했다. 회의록은 나의 몫이기에 조기 퇴근할 수도 없었다. 십 년이 조금 더 된 이야기지만 그때만 해도 팀 막내는 함부로 아프면 안 되는 무자비한 야만의 시대였다. 난 분명 이 회사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입사했건만 내 체력은 한참 기준 미달이었다. 취업 스터디에서 그 누구도 조언해 준 적 없는 게 체력이었는데.
힘든 직장 생활을 하는 나에게 당시 만나던 그 수련의는 한약을 지어주었다. 난 약빨이 잘 받았다. 약을 먹으면 컨디션이 좋아지는 게 아주 신통했다. 강압적인 술자리에서도 조금 더 버틸 수 있었고 다음 날 눈도 가볍게 떠졌다. 그는 종류별로 한약을 지어주었다. 근육통을 동반할 때, 소화가 되지 않을 때 등 과로에도 종류가 다양했다. 애정이 담긴 한약을 꿀꺽꿀꺽 먹으며 몸이 보내는 아우성을 잠재우기 바빴지만, 무자비한 야생에서 흠칫 두들겨 맞아도 괜찮은 맷집까진 생기지 않았다. 자부심을 가지고 입사한 첫 직장은 결국 다닌 지 두 해 째에 퇴사했다. 놀랍게도, 한약까지 지어주며 내 건강을 염려하고 나의 직장 생활을 조력한 그는 내가 퇴사하자 태도가 변했다. 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는 절대 말하지 않았지만 자명했다. 내가 무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대학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는데 자기만 바라보며 내가 그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을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그는 연봉으로 환산되는 내 노동력을 사랑했을 뿐이고 아무 소득이 없는 나를 감당하기엔 너무나 나약했다. 신의가 이쑤시개만도 못 한 인간과 연애했다니. 내가 뭐 돈이라도 빌렸으면 말을 안 한다. 그가 밝히지 않은 이별 사유를 이토록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내 이직 소식을 듣고는 석고대죄를 하며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사람은 잊혔지만 한약의 약빨은 오래 기억되었다. 한약을 복용하고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경험은 너무나 달콤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상쾌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단 말인가. 기상 알람을 듣고 오전 반차를 쓸까 말까 번뇌에 빠지는 대신 두 눈을 뜬 채로 아침을 먹을 정신이 생겼다. 야근 후에도 대충 씻고 침대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치실과 치간칫솔을 써가며 양치할 에너지가 남았다. 언제나 이런 상태에 있고 싶었다. 다행히 이후에도 한약을 지어먹으면 웬만하면 효과가 좋았다. 난 너무 정직하게 허약해서 몸을 보신하기 위한 처방이 그리 까다로울 것이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그 수련의가 대단한 명의였던 것이 아니었다). 가엽게도 이직한 곳에서도 일복은 나를 향해 직진으로 들이닥쳤다. 야근과 출장이 계속되었다. 야근이 몰리는 시기가 오면 물을 떠놓고 비는 마음으로 한의원을 찾았다. 배송된 한약을 냉장고에 넣으며 이번 고비도 잘 넘겨야 한다 비장하게 속삭였다. 출장 짐을 쌀 때마다 캐리어에 한약을 넣었고, 의심 물질을 소지했다고 공항에서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언제나 위험을 감수했다.
이쯤 되면 한약을 먹는 것보다 직업을 바꾸는 게 현명한 선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의사들이 나를 진료할 때 하는 말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무느씨는 책임감이 강하고 일을 아주 잘하는 스타일이에요. 이런 스타일에 키가 작았으면 속으로 쌓이는 게 많아 힘든데(?) 키도 커서 대범하고요. 제가 사장이면 무느씨 같은 직원을 아주 좋아할 겁니다.” 주로 나이가 지긋한 한의사들은 마치 사주풀이를 해주는 것처럼 내 맥만 짚고도 내 기질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어떤 환경이 어울리는지 말해줬다. 그걸 듣는 것은 꽤 재미있다. ‘그래서 저 어떻게 해야 되나요, 과로사할 운명인가요 아닌가요’하고 철학원에서 할 법한 질문을 참고, 어떤 약재가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 꼼꼼히 묻고 머릿속에 기억하려고 애쓴다. 회사에 열심히 부역할 좋은 인재라는 말을 한의원에서까지 들으면 잠시 기분이 으쓱하지만 금방 ‘난 그냥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구나’하고 씁쓸해진다. 내 몸과 영혼을 갈아 넣어 회사 좋을 일만 잔뜩 해주는 인간. 거기에 내 돈 들여서 한약재도 많이 갈아 넣는다.
언젠가 한 지인이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영양제를 챙겨 먹지 한약은 잘 안 먹지 않나?” 그는 심지어 한의원들이 영업은 잘 되는지 걱정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건강한 사람이 분명했다. 기운이 후달리고, 드러눕고 싶고, 몸에서 각종 염증이 올라와 열기운과 근육통이 오는 경험을 해본 적이라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가 고작일 것이다. 몸에 이상 반응이 오면 필요한 영양제를 쏙쏙 투입해 진정시키는, 밥이 보약이라는 옛말이 통하는 튼튼한 몸이다. 내 지인은 어쩌면 회사 동료가 몸이 아파 자리를 비우는 걸 이해 못 할지 모른다. 그래도 기억해 주어라. 그 동료도 출장 가방에 한약을 챙기며 최선을 다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충분히 무겁지만 유난히 몸이 고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소한 약재가 불투명하게 뒤섞여 있는 한약이 어떻게 체력 증진에 도움을 주는지는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묻고 매번 까먹는다). 그래도 난 한약을 먹는다. 가진 건 사무직 노동자로서의 재능밖에 없기에 오늘도 한약을 장전하며 출근에 임한다. 몸은 아파도 마음은 괴롭지 않도록 우리 서로의 아픈 몸은 딱하게 봐주기를, 그리고 아직 일터에 남아있는 야만 시대가 어서 저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