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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Oct 24. 2023

착한 남편과 사는 고충

  남편이 주방에서 내 도움을 요청하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같은 집에 몇 년째 함께 살고 있는데도 자주 쓰는 식재료의 위치를 왜 나에게 물어보는지. 그도 나만큼 주방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찾지 못하고 있으면, 난 한 번씩 참을 수가 없어 불친절한 대답에 그를 타박하는 말까지 덧붙이게 된다. ‘거기 있잖아, 거기 거기. 제대로 봤어? 다시 똑바로 봐 봐.’ 요리를 시작하고서는 요란하게 우당탕탕 거리고 혼자 손을 덴다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하면서 큰 소리로 ‘아악’ 하는 비명을 지른다. 뭐 얼마나 대단한 요리를 한다고 저리 요란해? 분명 신혼 때에는 꼼꼼하지 못 한 그를 놀리며 웃어 넘기기도 했었는데 이젠 눈을 흘기고 있다.


  이 못 미더운 몸놀림이 주방에 선 기혼 남성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겠거니 생각은 한다(내 또래 남자에 한해 이야기해 본다). 그 말은 즉슨 내가 느끼는 속 터짐 또한 많은 여성들이 갖는 보편적인 정서라는 거다. 하지만 내 남편이 가진 어떤 특성 때문에 나의 속 터짐은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착함’이냐 하면, 남자의 외모나 성격이 마초 성향과는 거리가 멀 때 느껴지는 상냥함과 편안함이 있는데 그 분위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착함’이다.


  착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나를 골탕 먹이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기에 그를 나무라면서도 마음이 꺼림칙하다. 이게 다 칸트 때문이다. 행위의 결과가 아닌 행위자의 동기로 선악을 판단해야 한다나 뭐라나. 학창 시절 달달 외웠던 권위자의 말이 떠오르니 나는 분명 화가 났지만 분노를 느끼고 표출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부끄러움도 든다. 그래도 반복되는 남편의 실수가 시정되어야 하는 까닭은 단지 내 기분이 나아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안 내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함이다. 비록 내 감정도 복잡해지고 그도 마음이 상하지만 집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려면 괴로움을 삼키고 쓴소리를 발사해야 하는 사명이 나에게 있다. 이것 또한 칸트가 말한 선한 의지의 발로 아니겠는가.


  내가 안 내던 짜증을 부리자 웬만하면 내 말을 착실하게 듣는 남편도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그의 입장은 매번 비슷하다. 그는 내가 요구하는 내용들을 기억하려고 마음속에 새기기까지 하지만 순간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거나 실수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남편은 내가 화를 내면 상처를 받고 더 나아가 자신이 너무 형편없게 느껴진다는 말도 덧붙인다. 한 마디로 좋게 말해달라는 거다.


  그래, 내가 기분 나쁘게 말을 던진 건 인정하겠다. 좀 날카롭게 쏘아붙이긴 했다. 그의 앞에서는 적당히 참아 넘기고 친구들에게 남편 흉을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어딘가에는 풀어야 한다). 하지만 나와 같은 경우엔 이게 더 어렵다. 남편을 아는 내 친구들은 나의 고발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가진 좋은 자질과 나의 분노는 분명 별개의 것으로 양립하지만,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후광이 내 불만을 떳떳하지 못하게 한다. 몇몇은 칸트 파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너그럽게 봐주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토록 열심히 하는데 왜 여태껏 잘하지는 못 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에게 답을 줄 수가 없다. 남자는 화성인지 토성인지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온 지라 태생부터 다르다는 오래된 헛소리를 믿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착한 그와 결혼한 것은 누가 베푼 은혜도 아니고 행운도 아니고 애정을 바탕으로 한 나의 논리적 사고와 철저한 계산에 입각한 결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난 지금의 남편보다 더 못 한 사람을 만나 결혼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이 정도로 좋은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같이 살면서 생기는 불만을 혼자 품고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이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내 결혼이 성립할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이다. 내 결혼뿐만이 아니다. 우리 여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여자 속 썩이는 못난 남자와 결혼하려 드는 여자는 없다. 착하다는 것만으로 추가 점수를 받고, 집안일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시대는 진작에 종료되었다.


  사실 집안일에 대한 남편의 안일한 태도가 아기들이 나오기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집안 살림에 안일하고 소질이 없었기에 우리는 마음대로 집안일의 무게를 축소해 적은 노동으로도 달콤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육아에서는 내 임의로 일을 축소할 수가 없었고 처음 접하는 상황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이 계속 요구되었다. 지금 개월 수에 어떤 놀이를 해줘야 하는지, 밥을 안 먹는 아기에게 어떤 반찬을 만들어 주어야 할지, 어느 정도의 발육이 정상인지 찾느라 쉬면서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내가 하는 고민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나를 미치게 했는데, 집에서 이런저런 고민으로 미쳐가고 있는 건 나 혼자였다.


  그 와중에 남편은 무심하게 ‘오늘 애들 목욕 몇 시에 시킬까?’, ‘오늘 이유식 뭐 꺼내줄까?’와 같은 자잘한 질문들을 나에게 던졌다. 나도 혼자 싸매고 있던 고민을 그와 나누었지만, 내가 던지는 질문에 담긴 고민을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성실하게 아가들을 목욕시키고, 밥을 먹이고, 집을 치우고, 아기를 재우느라 바빴지만 과업이 완료되면 그만이었다. 남편보다 몸은 덜 쓴다 해도 내 영혼은 언제나 육아에 메여있었다. 자진한 적은 없지만 육아의 컨트롤 타워는 나였다. 이걸 인지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날 선 말들로 다정했던 부부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었다.


 나는 더 원한다. 착하기만 하지 말고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집안일에 있어서 내 이상의 능력을 갖기를, 내가 맘카페를 들락이며 각종 육아 정보를 알아보는 만큼 육아에 더 몰입하기를 말이다.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진짜로 화성에서 온 게 아닌 이상(내가 아는 한 그는 지구인이다) 내가 하는 걸 그는 왜 하지 못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남자들은 여자가 결혼생활에서 겪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도 견디고 있지 않다. 명절만 되면 여자들이 며느리가 된 자신의 서열을 눈으로 확인하며 스트레스받는 동안, 아기에게 밥 몇 숟갈 먹인다고 ‘1등 아빠’라는 칭찬을 받는 것이 남자다. 그렇다면 남은 에너지를 여자보다 더 살림에 투자해야 공평하다. 덧셈 뺄셈만 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논리이다.


 착한 남편은 많아졌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착한 남편이라고 한다. 똑똑한 여자들이 많아지니 여자 말을 잘 듣는 남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자가 말을 하게 만들 것인가? 여자가 지시하는 역할을 맡는 이상,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골치 아픈 고민은 여자만의 것이 된다. 그리고 여자가 많은 조사와 변증을 거쳐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남자가 시키는 일을 해냈을 때처럼 ‘착하다’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못된 상사가 되어 남편을 부하 직원 부리듯 지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상하 관계가 아니니 공동 대표직을 맡아 마땅하다. 같은 무게를 지고 가고 싶다.


  육아나 집안일에 대한 섬세한 고민에 관여하지 않고 고작 시키는 일만 해내는 것을 착하다고 일컫는 건 남자들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처사다. 그들도 여성과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있고 여성만큼 학습할 수 있다. 남자들도 가사 노동에서 분리수거와 같은 단순한 업무만 배정받는 것이 자존심 상하지 않는가? 비록 오랜 세월에 걸쳐 집안일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도태된 능력을 되찾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선 남자들도 진취적으로 투쟁할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으로, 이유식을 시작한 아기에게 어떤 식재료들까지 알레르기 반응 테스트를 했는지, 기저귀 단계를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와 같은 중요하고 심도 깊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를 바란다. 우리는 함께 더 나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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