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합니다. 당신은 만 40세를 앞두고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짝짝짝.
8월은 잠시 회사가 여유로울 때라 평일에 며칠 휴가를 썼다. 가족 여행을 떠난다거나 하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직장 아니면 육아라는 두 가지 선택지뿐인 삶에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아이 한 명이 고열을 동반한 장염을 앓는 바람에 이틀간 등원을 하지 못하였고, 나의 휴가는 고스란히 육아에 할애되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뭐 얼마나 재미난 일을 한다고 기대를 했나. 일상 탈출을 꿈꾸던 나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한껏 중무장한 일상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놀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병 수발이라는 처벌을 받는다'는 사고방식도 정상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육아와 관련해서 느슨한 마음을 먹으면 이런 징벌 개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요즘엔 둥이들이 밤 11시 넘어서 잤다. 밤 8시부터 점차적으로 소등하다가 밤 10시가 넘으면 간접 조명 달랑 1개만 켜놓고 온 집안을 컴컴하게 해놓는 데에도, 그 어둠 속에서 졸고 있는 건 나랑 남편뿐이다. 아이들은 잠이 안 온다며 짜증을 내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놀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11시 넘어서까지 내내 졸다 애들 책 읽어주다 하다가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일찍 잠들려면 자고로 낮에 실컷 놀아야 하는 법. 그래서 지난 일요일엔 낮잠을 안 재우지 않았다(아이들이 원하는 바이다). 그랬더니 한 명은 저녁 먹다가 스르륵 잠들었고, 한 명은 밤 9시에 잠들어버렸다. 얼마 만의 이른 육퇴인지. 비록 목욕을 못 시켜서 월요일에 머리가 좀 떡져있겠지만 일단 찾아온 육퇴는 대 환영이고요.
하지만 남는 시간에 침대로 뛰어들어가는 것 말고, 내가 크게 하고 싶은 게 없다. 유튜브도,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몰입할 수 없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루의 끝에 나에게 어떤 달콤한 보상이 주어지길 원하는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영화 재밌을 것 같았는데' 하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그 영화 속으로 마음껏 던질 수가 없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책장을 넘기며 나를 다른 세계로 잠시 보내는 행위도 연료 부족으로 시동조차 안 걸린다. 누워서 트위터로 테일러 스위프트의 12번째 앨범 (10월 3일 발매) 관련된 다양한 이스터 에그들을 분석한 트윗을 보는 것만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고의 흥분이다. (제발 10월 3일 전에 싱글 앨범이라도 내주오...)
그렇게 누워 있다가 시계를 보면 어느새 잘 시간. 자고 일어나면 또 출근해야 하는데 입을 옷은 없고. 어느 순간부터 쇼핑은 귀찮고 돈이 아깝다. 대충 입고 다니는 내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여기도 연료 부족이라 개선의 여지가 없다. 예전엔 선크림만 발라도 봐줄만했던 것 같은데 대충 입은 옷에 대충 말린 머리로 오. 출. 완 하고 나면 내 꼬락서니가 참 볼품없다. 가뜩이나 입술색도 없구먼 입술은 하얗게 터있지만 않으면 다행인 것을...
아무래도 최근 몇 달 동안 회사에 속 시끄러운 일들이 너무 정신없이 몰아친 탓에 반작용으로 멍 때리는 시기가 이어지는 것인가 싶지만, 40년 가까이 살아보니 난 어차피 애매하게 우울한 상태가 기본값이다. 이렇게 우울하게 생겨먹은 애가 무럭무럭 자라서, 휴가 날에 헬스장 가서 운동이나 하는 노잼 인간이 되어버리다니 얼마나 바람직하고 건전한가. 이제 '삶이 재미있어야 한다'거나, '특별한 여가를 보내야 한다' 하는 나르시즘적인 생각만 집어치우면 되겠다. 욕구 불만족 상태인 듯하지만 사실은 욕구조차도 딱히 없잖아 이제...?! 조금만 더 구력이 쌓이면, 무미건조한 삶을 아무런 불만없이 살 수 있는 거친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을 듯. 아직은 멀었고 50살엔 그렇게 되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