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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의 공격

by 무느무느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일까.


밤에 잘 준비를 하는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길래, '이리 누워봐. 엄마가 문질러 줄게' 했다. 처음엔 간지럽다고 똑바로 누워있지도 못하다가 이내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내 손의 리듬에 익숙해졌는지 얌전해진다. '내가 여기 누워있는 아이였던 적이 있었지.' 어릴 적 생각이 어렴풋이 피어오르면서, 자주 내 배를 문질러 주던 엄마의 손, 젊은 엄마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때가 몇 살 때쯤이었을까. 지금 내 딸과 비슷한 나이었다면 4살? 어쩌면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순수한 내 기억이라면 내 눈으로 바라본 풍경만 기억이 나야 할 터인데, 누워있는 내 모습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웃기다. 그건 분명 상상일 건데, 이 연상 작용 속에서 가장 그리워지는 건 배 아프다며 바닥에 누워있는 어린 시절의 나이다. 나에 대한 의심, 누군가를 향한 미움,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던 시절. 크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마도 엄마가 (바퀴?) 벌레를 잡아 화장실 변기 물에 내려보냈다는 말에 벌레가 불쌍하다며 혼자 울먹이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에 허우적였을 작은 생물을 생각하며 그 숨 막히는 고통이 나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이 정도 회상이면 충분하다. 더 감상에 젖고 싶지도 않고 옛 기억을 불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따뜻했던 기억이 그 뒤에 이어진 공격, 비난, 실망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않으니까. 그래, 난 이렇게 속이 좁은 채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고작 그 시절의 나만을 연민하는 볼품없는 어른. 그렇다고 가족 누구를 딱히 원망하며 지내지는 않는다. 물론 그러던 시절도 있었다. 끝없는 분노와 불안으로 잠을 못 자던 시기가 길었다. 하지만 먹고살아야 하니까, 약 먹고 운동하고 밥 먹고 계속 살아간다. 가족 내 누군가가 준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또 어떤 감정이 올라온다. 최대한 모른척한다. 배를 어루만져 주었던 엄마 손이 떠올랐을 때 드는 아련함도 모른척하듯이.


아이 배가 왜 아픈지 안다. 저녁 간식으로 먹는 요플레에 유산균을 타서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장이 평소보다 활발히 움직이다 보니 불편감이 느껴지는 것일 거다. 변비 때문이야. 이해해 줘. 대신 내 손으로 열심히 문질러 줄게. 손이 더 부드럽고 따뜻하면 좋았을 텐데 싶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살고 싶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아이는 자꾸 내가 쌓은 방어막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냥 존재만으로, 배 아프다고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단단히 쌓아놓은 돌벽은 서서히 말라버린 모래알이 되어 흘러내린다. 아이가 클수록 용감해질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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