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pr 15. 2019

인연

by 수연

집에 오는 길 지하철에서 멋진 분이 주신 멋진 선물, 피천득의 인연을 읽었다. 며칠 전에 엄마가 알려줬던 skid row의 I remember you를 들으며 읽었다.



지난 금요일에는 참 오랜만에 예전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네 집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내가 만들어간 케이크로 생일파티를 했고 할리갈리랑 닌텐도 위를 하며 벌주도 만들어 마셨다. 오랜만에 만나 어색하진 않을지 걱정했는데 우리는 중학생때와 같았다. 많이 시끄러웠고 많이 먹고 많이 웃었다. 우리는 9년,8년,7년 전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때는 경찰과 도둑, 홍삼게임, 방방을 하고 놀았었다. ‘~건드리고 살아남기’ 라는 놀이도 만들었었다. 선물로는 도자기로 못생긴 얼굴을 만들어주었고, 대야에 물을 받아 오리인형을 띄워주기도 했었다. 여행을 가고싶을때는 친구의 집에 모여 부모님께 허락해주시라는 롤링페이퍼를 썼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흩어진 친구들이 너무 그리워 잡지 구독자코너에 사진을 띄운적도 있다. 이사를 온 친구의 집에는 아직도 그 도자기얼굴과 잡지가 남아있었다.




한참동안, 가장 익숙한 이 친구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았었다. 아마도 2주동안 돈을 모아 간 애슐리에서 8접시를 먹던 친구들과 안주가 이만원인 주점에 가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각자 대학에 입학한 우리는 만날때마다 술을 마셨고, 더 이상 방방에서 뛰어 놀지 못했다. 선물로는 도자기얼굴 대신 카카오 선물하기에서 교환권을 보내주었다. 통금시간에 맞춰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집에 가야할때는 눈치를 보았다.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었고, 나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탓하다가 지쳐 친구들의 탓으로 돌리곤 하였다. 속에서 합리화를 하였다. 쟤가 대학가더니 저렇게 변했구나, 나는 힘든데 쟤는 운이 좋아 재밌게 지내나보다, 이제 어울릴 수 없겠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고, 연락을 차갑게 끊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만나지 않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들을 밀어내게 했던 차가운 날들도 이어졌었고, 새로운 시작, 경험을 한 따듯한 날들도 있었다. 지하철을 타며 책을 읽는 동안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 많은 일들 중 새롭고 좋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일단 지금 이 멋진 책을 선물받은 일에 감동하였다. 나에게 매주 세번 편지를 보내주는 사람도 떠올렸고, 사랑하는 연인 관계를 맺게 해준 과정도 그려보았다. 나 혼자 그냥 좋아서 맛있다고 떠들었던 케이크를 사오신 분도, 처음 공방에서 과자를 만들어본 일도, 일하는 곳에 매일 나를 보러오던 손님과 대화를 나누던 기억도 떠올랐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 감정은 익숙한 친구들을 만나지 않은 동안 여러 과정을 거쳐 마주하게 된 것이지만, 그들과 멀어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늘 갑자기 깨달은 것이 그렇다. 멀어졌던 친구들과 다시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새롭고 좋은 사람들과의 경험 덕분이지만, 그 경험들이 있기까진 익숙한 그 친구들이 곁을 지켜주었다. 상황이 변해가며 서로 조금씩 마음을 상하게 했었어도, 이들이 내 청소년기를 밝게 회상하게 만들어주었고, 각자의 앞으로 나아가게도 해주었기에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책의 한 부분에 꽂혀 한참을 읽다가 이런 생각까지 와버리게 되었다.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 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맞으며 나날이 작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피천득의 인연, ‘장수’ 중)]



 


이 글이 소박하고 거대하게 읽혔다. 나는 남탓을 하고 관계를 끊어냈던 잘못을 반성하며, 이제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으며 작고 착한 일을 하고 과거를 다시 사는’ 일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친구들과 먹을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지만, 다들 힘 많이 썼겠다고 말해주기에 “응 힘 좀 썼어~엄청 맛있을거야~”라고 답했다. 친구들은 내가 많이 거만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더 낫다고도 덧붙여주었다. 이제 낯선 모습을 서로에게 보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내가 성숙해지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많이 만나며 같은 모습을 유지하거나 서로 닮아가지 않아도 친구들은 각자의 모습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다 가끔 만나면 익숙하고 같은 과거를 회상하다가도 그 낯선 모습들을 올~하고 인정해줄 것이다. 각자의 인연들 덕분에 다양한 모습들로 더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책을 읽다가 쓰는 이 느낌이 계속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우울한 월요일이 왔지만 아까와 달리 그닥 싫지 않아져서. 선물을 주신 분, 위 친구들과의 만남, 기억, 떠오르는 곁의 얼굴들, 책 표지의 맑은 웃음 모두가 만들어낸 긍정적 결과이고, 나는 이들에 전염된 것이라 생각한다. 내 이런 감정, 글에도 누군가 전염되어 줄 수 있을까? 그럼 참 좋겠다. 지금은 근심이 없어서 잠들기가 어려운 밤이다.




by 수연

instagram @yoridogjoripug







매거진의 이전글 두부집 타버린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