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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pr 21. 2019

4월 8일 낮꿈

 by  승민

 


색조도 명암도 없고 흰색과 검정색만 존재하는 곳이다. 

시간은 희고 검은 협소한 방에서 시작된다. 창 하나,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가지가 걸려있는 빨래 건조대 하나가 존재하는 방에 남자 하나가 누워있다. 그리고 한 명이 더 있다. 해골같이 얇고 긴 팔다리, 두껍고 굽은 등, 뾰족한 턱을 가진 거미같은 흑백의 남자가 창밖에 있다. 그는 위압적이다. 그는 얇은 팔다리로 곱등이처럼 튀어올라 방의 창가로 올라섰다. 방 안의 남자는 두렵다. 남자는 침대끝을 붙잡고 침대 옆으로 번데기처럼 몸만 떨군다. 빨래 건조대에 걸려있는 옷가지 뒤로 몸을 숨긴다. 바닥에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버틴다. 그 때 남자의 얼굴 바로 옆으로, 거미같은 남자의 희고 검은 얼굴이 밀착한다. 그는 크고 긴 타원형으로 얼굴과 눈이 변형된 채 말한다. 도망치지 마세요.


시간은 컬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비가 굵고 매섭게 내린다. 대로 위로 차들이 비를 튀기며 빠르게 지나간다. 거무죽죽하고 어지러운 날이다. 이날 사람들이 죽었다. 여럿 죽었다. 남자가 죽였다. 왜 죽였는지 본인도 모른다. 여경 셋이 총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그 중 한 명을 찔렀다. 그는 뒷걸음질치다 차도 위로 냅다 달린다. 차들이 매섭게 지나간다. 그는 달린다. 뒤에선 경찰들이 추격한다. 그는 달리다 자전거 하나를 줍는다. 경찰들은 자전거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남자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계속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본인도 왜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할 틈이 없다. 그는 대로변을 달리고 건물에 들어서고 계단 위를 달려 내려가며, 죽도록 달린다. 그는 계단 위를 내려가며 학교 계단을 떠올린다. 친구 생각이 난다. 친구에게 가볼까 생각한다. 안된다. 그곳은 위험하다. 여기서 멈춰있을 만한 곳은 없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달린다. 


남자는 달리고 달렸다. 비는 그치고 세상은 뿌옇다. 그의 눈앞엔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가 놓여있다. 넓은 차도 옆에 좁은 인도가 있는, 금문교와 꼭 닮은 다리이다. 

다리 위로 방대한 인간행렬이 하나같이 웃으며 상기된 얼굴로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들은 남자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외친다. 미국으로 가자 미국으로 가자

남자는 행렬이 걷는 방향, 자신의 등 뒤의 방향이 미국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행렬을 따라가는게 맞을지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는 지나온 길은 돌아볼 수가 없다. 그는 사람 하나에게 다리 너머 반대편 끝 저곳은 어디냐고 물었다. 일본이라고 했다. 그는 다리 위를 달렸다. 인간행렬 사이사이를 비집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는 위태롭다.


다리 위의 사람 수가 줄었다. 뿌연 먼지가 걷히었다. 인도 위로 끝없이 길게 세워진 흰 천막이 나왔다. 남자는 흰 꽃잎이 흩날리는 천막 아래로 페달을 밟아 들어간다. 다리 난간을 가리고 있는 흰 천 뒤에서 여자들이 줄줄이 나온다. 희고 깨끗하며 거대한 키를 가진 여자들이다. 그들의 얼굴과 몸은 말랑한 젤리같은 질감으로 보였다. 커다란 눈동자는 남색이고 투명했다. 여자들은 흰색천을 머리 위에 쓰고 있다가 손가락이 없는 흰 팔로 천을 걷으며 걸어나온다. 그리고 꽃잎이 흩날리는 모양새와 같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이렇다. 

흰색 프리지아를 밟고 떨어져버렸네 흰색 프리지아를 밟고 떨어져버렸어

남자는 묘한 기분에 홀려 페달 밟는 속도가 늦어진다.

뒤에서 누군가 말한다. 저 여자들은 다리 위에서 자살한 사람이다.

여자경찰 둘이 있다. 남자는 당황한다. 얼굴을 덮은 흰 천을 걷으며 나오던 흰색 여자 한 명이 자전거에 치인다. 그녀는 또 한 번 죽는다. 남자는 정신을 잃는다.


흰색과 검은색만 존재하는 방이다. 남자는 그곳을 탈출하고 싶다. 거미같은 남자는 위압적이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도망치지 마세요. 


도망치지 마세요. 여자경찰이 그를 붙잡고 말한다. 남자는 정신이 들었다. 그는 당황한다. 당황해서 경찰의 총을 뺐어 여경의 몸에 두 발을 쏜다. 남자는 도망간다.







by 승민

instagram @seungm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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