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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pr 29. 2019

인연-나는 오월 속에 있다

by 퇴근후책방 April, 2019



초등학생 때, 학교 간 대학생 큰언니 방에 들어가면 재밌는 게 참 많았다. 언니 옷도 슬쩍 꺼내 입어보고 언니가 사 모은 카세트 테이프며 CD로 90년대 유행가와 팝송을 듣고, 책장 한 가득 꽂힌 책 중에 하나 골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읽었다.

하루는 새하얀 표지에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를 품은 조개가 그려진 책을 꺼내 들었다.

<인연>_피천득


“엄마~~~ 피천득이 뭐야?”

“하하하, 사람 이름이야. 수필가.”



‘수필가? 수필은 또 뭐야?’

책을 열어보니 마침 ‘수필’이라는 글이 있었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 중에서


잘은 몰라도 수필은 그렇게 은은하고, 깨끗하고, 우아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오월’ 중에서


금방 세수하고 나오는 대학생 언니의 뽀얀 얼굴을 바라봤다. 

‘아~!’

백일장 하러 간 공원 잔디밭 나무 그늘에 앉아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들을 바라봤다.

‘아~!’

얼마 전, 다른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올라 ‘오월’을 다시 찾아 읽었다.

이런 부분이 있었나? 싶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를 읽고 울었다.

흐아… 피천득 할아버지…



100세 시대라니까 그렇다치고, 열두 달로 나눠 계산해보니

지금 나는 막 4월이 끝나 있었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이제 와서 사람이든 일이든 뭔가에 나를 던져 뛰어들기엔 너무 지쳤다고,

과연 앞으로의 내 삶에 뭐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얼마나 새롭고 특별한 인연이 있을 것이냐 회의하던 건방진 내게

피천득 할아버지가 빙긋이 웃으며 속삭였다.


‘참으로 즐겁다.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퇴근후책방

인스타 @afterwork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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