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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May 04. 2019

갑자기

by 수연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아?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서 봤어. 두번째 보는, [토니 에드만]이라는 영화야. 처음에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왤까? 의아했지만 보지 않으면 며칠간 머릿속을 떠돌며 그거 봐야되는데, 뭔 내용이더라, 끝이 어떻더라, 하고 괴로워할 것 같았어.


아버지와 딸이 주인공인 영화야. 딸은 성공한, 누가봐도 멋진 커리어우먼이야. 한참 바쁘게 살고 있는 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찾아와. 아버지는 큰 덩치에, 눈치 없는 농담을 일삼고 딸의 곁을 계속 기웃거리며 불편하게 만들어. 딸은 좋은 딸이 되고싶어하지만 아버지의 만행을 참기가 힘들어하고, 아버지는 무표정하고 찌든 딸을 웃게 해주고 싶지만 계속 빗나가고 말아.

“이것 저것 하다보면 어느 새 다 지나가버려. 순간을 붙잡아놓을 순 없잖니. 가끔 생각해. 너가 처음 자전거를 배우던 때와, 버스정류장에서 널 마주쳤을 때 같은 것들. 하지만 지나고나서야 깨닫지, 막상 그 순간에는 깨달을 수가 없어.”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며 진심을 전해. 그들은 빗나가다가도 몇번 포옹하고, 마주보고 웃기도 해. 딸은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당신의 의치를 끼며 웃겨주기도 하고, 아버지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지만 그 모습은 사진에서뿐이야. 딸은 금방 혼자 뒤돌아 의치를 빼고, 다시 웃음을 지워내거든.


가까워지고 싶어도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가 있고, 붙잡고 싶어도 붙잡아둘 수 없는 것이 있고, 잊고 싶지 않아도 잊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2시간 40분동안 이야기하는 영화야. 좀 길지? 나는 나쁘지 않았어. 난 그냥 미래에, 현재에 계속 불안해하는 중이었는데 뜬금없이 왜 이 영화가 떠오른걸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영화를 보면서 콕 박힌 장면은 뭔지 알겠다. 아버지가 딸에게 너무 찌들었다, 너도 인생을 즐기냐, 행복하냐 등등 불편한 질문을 하자 딸은 되물어. “그럼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데요?” “글쎄, 대답을 못하겠구나. 그냥 너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아버지는 딸이 아이때처럼 웃으면서, 친밀하게 행복하게 살길 바랐어. 하지만 그게 어떤건지는 몰랐던거야. 그리고 자신이 이끌어줄 수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어. 물론 딸이 웃지 않고 항상 바쁘고, 안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한 건 맞지만 딱히 바뀌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그닥 바뀌면서 쫓을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 이들을 보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사는 것도 참 불편한 일이지만, 억지로 의미를 만들고 맞추려 애쓰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힘들겠더라. 요즘 나는 항상 불안해. 키운 능력이 없고, 시간을 만든 대신 수입이 적고, 그렇게 만든 시간인데도 너무 빠르고 부족하게 느껴지고, 가진 것을 잃게 될까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불안할까봐 모든 걸 불안해하며 벗어나기 위해 어떤 밝은 의미를 만들어내려 애썼어. ‘~일 하고 살기’ 라던가 ‘~마음 가지기’ 같은 것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다시 불안해질 거라는 걸 알아. 그러니 의미 만드는 일은 그만하려고. 물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 외의 것은 굳이 정해놓을 필요가 없는가봐. 어차피 계속 불안할테니까. 중요한 것은 적을수록 좋겠지. 그냥 매일 불안하게 지내던대로 지내다 가끔씩, 아니면 자주 불안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는게 최선인 것 같아. 오늘 갑자기 생각난 이 영화를 볼 때는 불안하지 않았어.


오늘 아침에 갑자기 다래끼가 났어. 또 예전에 일하던 곳 근처를 가다가 갑자기 같이 일하던 언니가 생각이 났는데, 우연히 마주쳤어. 그리고 카톡으로 오랜만에 한참 얘기했어. 자판 대화인 것은 아쉽지만 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신기했어. 사실 별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인데 그냥 갑자기, 갑자기라는 말을 하다보니까 뭔가 달라보이는거야. 왜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어. 갑자기 다래끼가 났고 갑자기 생각난 사람과 마주쳤어. 갑자기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서 봤어. 갑자기에는 의미도 이유도 없어서 재미있었어. 갑자기라는 말만 해도 단순해지는 것 같아. 덕분에 지금은 불안하지 않고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by 수연

instagram @yoridogjorip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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