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것은 가치를 잃지 않는 것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가치를 잃지 않는 것'



간만의 여행 일정에 비 소식만큼 귀찮은 것은 없다.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만 할 손이지만 우산을 들고 있어야 하고, 그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여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경우, 폭우를 만날 확률이 높고, 우산의 가치 이상의 구박과 억울함이 동반하는 것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비는 반갑지 않으나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차창에 쏟아지는 빗줄기,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 커피와 음악 (somebody to love 같은), 스윗한 감성 속에서 연애편지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거대한 철 덩어리는 제주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로써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의 신경은 온통 비에 있었다. 표선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상보다 더 심각한 폭우와 침수를 지나야만 했다. 매오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조금 전까지 폭우였던 비는 잠시 휴식을 하고 있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짙은 회색이었다. 다시 언제라도 뿌려줄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 차를 세웠다. 좁다란 등산로를 발견했으나 여기가 진짜 매오름 입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단 카메라를 들고 오름 입구로 돌진했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부진 각오였다. 걸음은 바빴다. 모든 것이 비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니스프리 재단에서 진행한 친환경 야자 매트를 눈여겨봐야 했고 매오름의 몇 가지 식물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띈 것은 불행히도 야자 매트가 아니었다. 지천으로 널렀을 자금우도 아니었다. 을씨년스러운 공포였다. 물기를 가득 먹은 안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서서히 드러내는 나무 터널도 내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한 충분한 위협이었다. 마치 적대감 가득한 섬의 주인이 낯선 이방인을 마주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도 걸음이 바빴던 것은 비에 대한 불안함과 안개 숲이 주는 공포였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하늘이 열리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정상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설마 하는 사이에 도착한 곳은 매오름 정상이었다.


새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넓은 바다가 보였다. 그것은 숨을 몰아 쉴 틈도 없이 우와! 하는 사이의 대반전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이 매오름의 정상인가 의심하면서도 이보다 더 높은 곳은 확인할 수 없었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고 표선의 바다 위로 선명한 푸른 하늘이 대기하고 있었다. 낮게 앉은 풀들은 물을 머금고 반짝반짝 자태를 빛내고 있었다. 멀리 가세 오름과 토산봉 일대를 조망할 수 있고, 표선의 해안을 볼 수 있었는데 펜션과 빌딩, 아파트가 모여있는 도시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어느 사스레피나무를 사진에 담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데 한 줄기 뻗어 있는 가지 위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때문이었다. 제법 대담하게 카메라를 드리 댔지만 꿈적도 안 하는 자태가 매오름의 주인이 아닌가 싶었다. 주인장의 동그란 눈동자가 카메라에 잡힌 것을 확인하고 올라온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먹구름 때문이었는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크게 엉덩방아를 찧며 데구르 구르기까지 했다. 비 먹은 나무계단을 조심한다고 했으나 중심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뻐근한 팔을 다독거리며 일어나 다시 내려오는데 그제야 친환경 야자 매트가 눈에 보이는 건 너무나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미끄러워질 수 없는 매트 덕에 내려오는 길은 올라온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온 후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검색이란 것을 해봐야 했다. 아무래도 이곳이 매오름이라고 확인할 만한 표시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산에서 내려와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찍어준 곳이 분명 하나 인터넷 검색에서 볼 수 있는 대나무 숲이라던가 체육시설 매오름 표지판을 볼 수 없었다. 아뿔싸 알고 보니 입구가 많은 매오름이었다. 난 다른 입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큰길로 나와 다시 또 다른 입구를 찾는 동안 분명히 본 것은 표석 위에 세운 매였는데 아마도 묏자리였던 것 같다. 그것은 더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입구를 찾았다. 이리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매오름은 여행객보다는 주민들을 위한 오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구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는 걷기에 좋은 오름이라면서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마침 비구름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장관이었다. 산책로는 두렵던 첫인상과 매우 달랐다. 초입부터 숲길이 열리고 카펫처럼 깔린 친환경 야자 매트가 눈길을 끌었다. 산책로는 이슬을 품고 있고 자금우는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 초록으로 한껏 채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도시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육시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매오름은 역시 친주민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은 살아가며 자연만을 강조할 수도 없고 또한 인간만을 위할 수도 없다. 여느 산책로를 따라 걸어도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매오름 산책은 특히 발밑이 편안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폭우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비 온 뒤 산은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을 모를 턱이 없을 터인데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야자 매트가 아니었을까? 둘레길을 걷고 있는 운동화가 깨끗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쓰레기 하나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닥 정리가 잘되어있는 것도 이곳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큰 역할이었을 것이다. 매오름의 숲길은 역동적이었다. 안개에 포개진 대나무 숲은 몽환적이었고, 큰 나무와 숲은 그윽하게 깊고 적당히 얕았다. 매오름은 변화무쌍한 날씨만큼 탐방의 묘미가 살아있는 매력적인 오름이 틀림없었다.


제주도에는 400여 개의 오름이 있고, 훼손은 진행 중이며, 그 상처를 보듬는 행동 또한 진행 중이다. 이 사이에 누구의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환경에 대한 건강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제주 오름은 생태적 보전가치와 빼어난 경치로 4계절 사랑받는 제주의 상징 중 하나이다. 오름을 덮고 있는 폐타이어는 미학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니스프리 재단에서 진행하는 친환경 야자 매트 교체는 자연을 대하는 작은 아이디어이다. 그 작은 아이디어가 의미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 일 것이다.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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