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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Feb 26. 2020

최상급 비밀 아지트

 소공동에는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 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백화점, 롯데 본점이 있다. 이 두 백화점은 여러모로 자존심 대결을 하기로도 유명하다. 롯데 백화점이 사람이 북적이는 대중적인 백화점이라면 신세계 본점은 돈 많은 고객이 이용한다는 풍문이 있었다. 나는 한때 바이어를 따라 두 백화점을 자주 갔었다. 둘 중 마음에 두는 곳을 택하라면 난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다. 신세계이다. 신세계 본점은 신관과 구관이 나누어져 있고 신관은 여느 백화점과 비슷하다. 그러나 구관은 클래식과 모던의 경계를 넘나든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이제부터는 당신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오셨습니다.라고 말하듯 압도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엔 세계의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있다. 나를 대충만 알아도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장소일 테지만, 서울에서 가장 은밀하게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신세계 본점의 구관이다. 그렇다면 명품을 애정 하기 때문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돈도 없고, 눈도 없고,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에 취미도 없다. 그런 내가 이곳을 은밀하게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 화장실이다. 나는 무언가에 예민한 구석이 없다. 하지만 화장실에 대해서만은 제법 고민을 하는 편이다. 화장실이란 무릇 그 용도가 신선하지 않은 만큼 신선해야 할 것이다. 냄새가 나는 만큼 향기로워야 하고, 예사롭지 않은 음향이 예상되는 만큼 질 좋은 사운드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너무 좁지 않게 너무 넓지도 말아야 하고, 너무 어둡지 않게 너무 밝아서도 안 된다. 당연히 청소가 잘 돼 있어야 하고, 거울의 물때 또한 사소하지 않다. 물의 온도는 조정이 잘 돼야 하고, 세정제와 물티슈가 고급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 채도가 낮고, 가볍지 않은 색감의 벽에는 원목 액자가 서너 개쯤 걸려있을 것이다. 옹색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무질서하나 이것 역시 철저하게 계산된 질서일 것이다. 그림은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부류를 가르는 스타일이 아닌 화풍이 좋을 것이고, 방치하는 느낌이 없도록 주기적으로 교체될 것이다.  개인실에는 불필요한 장식이 없어야 한다. 수준 낮은 에티켓 설명서도 없어야 한다. 보여야 할 것은 질 좋은 토일렛 페이퍼(질 낮은 페이퍼는 생각만 해도 해롭다)와 외투와 가방을 걸을 수 있는 단단한 옷걸이뿐이다. 쇼핑백을 올려놓을 단이 있으면 더욱더 좋고 문을 여닫을 넉넉한 공간이 있으면 더더욱 좋다. 변기는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주고 물은 파워 있게 내려가야 한다. 지나쳐서 좋은 곳은 화장실의 청결 정도일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화장실이 바로 신세계 구관의 화장실이었다. 만일 일확천금의 부를 얻어 건물을 신축하게 되다면 나는 화장실에 아낌없는 공을 드리겠다. 그곳에 들어가서 며칠을 지낸다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상상일 것이다.



 서울에 있는 화장실의 수는 무수하다. 그러나 이토록 친화력을 발휘하는 화장실은 흔하지 않다. 신세계백화점은 신관과 구관을 통하는 연결 복도가 있다. 신관에서 구관으로 넘어가면 명품에 걸맞게 인구 밀도가 현저히 낮아진다. 오랜 시간 머물러도 시간을 재촉하는 노크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조도가 낮아지고 BGM의 음량도 차분해진다. 신관보다 눈과 귀의 피로감이 덜하다. 나는 무수히 많은 명품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화장실만은 지나칠 수가 없다. 이곳을 발견했을 때는 마치 조선호텔 로비의 소파와 만났을 때처럼 다시 찾아오리라. 그리고 자주 이용하리라 다짐을 했다. 실제로 명동과 남대문, 회현 조금 더 넓은 범위로 시청과 광화문까지 갈 일이 있다면 간 김에라는 이유로 신세계 본관을 향한 경험이 있다. 좀 더 정확히 구관의 화장실을 목적지로 한 것이다. 이쯤 하면 신세계 본점 화장실은 나에게 은밀하게 쉴 수 있는 서울 최상급의 비밀 아지트라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죠-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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