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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Mar 07. 2020

현기증

    귓불이 얼얼했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가 사라진 후였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금요일 막차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지하철은 지나치게 훤했다. 상식은 없고 규정만 가득한 세상이다. 술을 이기지 못한 셀러리맨 한둘이 늘어져 있었다. 껌을 요란하게 씹으며 욕지거리를 하는 핑크 머리 여학생은 핸드폰을 거칠게 다루며 문자를 보낸다. 그 앞엔 커다란 블루투스 헤드폰을 쓰고 턱 놀이를 하는 덩치가 서 있었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발을 크게 벌려 중심을 잡았다. 헤드폰 사이로 힙합이 새어 나왔다. 그 들 뿐이었다. 아무도 조금 전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맞았던 뺨을 만져봤다. 열기가 느껴진다. 아무도 붉은 손자국이 나 있을 것만 같았다. 몸을 돌려 전철 차창에 얼굴을 비춰봤다. 그러나 자세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차창 건너편 핑크 머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몸을 바로 하니 핑크 머리는 눈길을 피했다. 핑크 머리의 멈췄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인다. 손가락에 맞춰 입 모양도 움찔움찔 움직였다. 전철이 흔들리면 힙합 덩치가 꿈틀하고 힙합 덩치가 꿈틀하면 전철이 흔들렸다. 이미 가로가 된 셀러리맨 둘은 벗어놓은 양복처럼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스마트폰의 액정에 노란 알림창이 나타났다. 그녀였다. <도착3번출구앞으로> 그녀의 문자는 언제나 띄어쓰기가 없고 미사여구가 없었다. 직설적이고 기분파이고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섹스를 하고 싶으면  <ㅇㅇ모텔> 술이 당기면 <술!> 노래가 하고 싶으면 <노래방고고!>였다. 모든 것이 나와 달랐다. 그런 그녀가 좋은지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나와홍대>라고 문자를 받은 것은 한 시간 전이였다. 늘 그런 식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면 내가 확인 못 할 수도 있는데 괜찮아?" "나왔잖아 된거아냐?" 그녀는 고민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 함께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녀에겐 고민이 없는 부분이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이케다 료지의 영상을 봤다. 료지의 영상은 일종의 최면과도 같다. 다짜고짜 뺨을 후려친 그 여인이 다시 생각났다. 차분했던 머리가 다시 혼탁해진다. 크고 작은 점과 선, 빛과 어둠이 불규칙하고 스피드한 리듬으로 가득찬  료지의 영상은 안구 안쪽의 신경계를 헤집어 놓는다. 어떤 기억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넓은지 좁은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빛뿐인 공간에서 있다. 맨홀 뚜껑만 한 검은 동그라미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나를 부른다. 그 검정은 보통의 검정이 아니다. 나는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물질을 개발했다는 영상을 봤다. 영상에서 소개된 물질의 색은 99.965%, 현존, 분광기, 반사율, 탄소나노튜브라는 생소한 용어를 극복할 정도로 압도적이라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블랙이었다. 밴타블랙이라고 했다. 다만 아쉬웠던 건 밴타블랙이란 이름의 생소함이랄까. 확실히 우리의 칠흑이라는 무게감보다 가볍고 경박했다. 그것은 오히려 세련된 이름 같았다. 칠흑의 공포에 비하면 밴타가 주는 공포는 제로에 가까웠다. 바로 그 밴타 블랙의 색이 눈앞에서 요동친다. 밴타블랙의  요동은 급이 다른 공포감을 가져왔다. 커질 땐 온통 암흑이 될 정도로 커졌다가 작아질 땐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장 작음을 유지하며 떠돌아다닌다. 손을 뻗어보려 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나를 희롱하듯 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잡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땀이 흘렀다. 그것만 잡으면 답답했던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 여인은 누구일까? 거세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이번 정차역은 신당 신당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바라보는 긴 머리의 여인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계속 노골적으로 나를 본다. 이유를 모르고 눈길을 피했지만, 여전히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는 사람인가? 어디서 봤나? 20대, 30대, 아니면 40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언뜻 보기에도 매력적인 여성이다. 섹시함과 지성 모성 어느 쪽인지 모르게 아니면 전부라 할 정도로 이상한 매력을 가진 여인이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평범한 얼굴이었고,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뉘앙스가 있었다. 이토록 노골적인 시선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난 자리를 옮길까도 했지만,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좀 우습게도 실례가 될지 몰라 그냥 있기로 했다. 나는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고 맥이 빨라지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유튜브를 보는 척했지만, 나의 시선은 지하철 바닥을 긁고 건너편 자리로 힘겹게 아주 힘들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엄청난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시선과 같았다. 검정 에나멜의 하이힐이 보였다. 가느다란 맨다리가 보였다. 꼬여있는 다리는 한 치의 틈이 없었다. 광택이 있는 실크 코튼의 검정 치맛단과 카키색 트렌치 코드가 보였다. 흰 블라우스를 따라 희고 가냘픈 목선이 보였다. 풀어진 단추 사이로 반짝이는 펜던트는 신비로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발산했다. 컬이 잘 받은 검은 머리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밴트블랙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짙은 마스카라의 보호를 받으며 한 번 흐트러짐 없이 최단 거리로 목표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나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나는 얼어버렸다는 것이 문학에만 존재하는 표현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의 검은 점과 나의 점은 팽팽한 직선으로 닿아있었다. 조금만 중심을 잃어도 그녀의 검은 홀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일어나 내 뺨을 후리기까지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실 난 그녀가 나를 친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정황상 그랬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플랫폼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창으로 보는 그녀의 걸음은 영화 속 고속촬영을 보듯 느리게 걷는다. 그리고 지하철은 최대한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3번 출구로 나오는 나를 본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 도로 한복판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최대한 가래를 긁어모아 침을 뱉었다. <왔냐? 가자!> 그녀는 마주 서기도 전에 걸음을 뗀다 <어디가?>라는 물음에 뒤돌아보더니 내 뺨을 유심히 살핀다 <그런데 너 얼굴이 빨갛다>라고 묻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도 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야기하려다 말았다. 그녀는  내 대답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돌아서며  <술이 당긴다>라며 인파 속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죠-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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