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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Mar 26. 2020

기억




 명절 때마다 우리 집은 큰댁으로 갔다. 이른 새벽부터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는 진회색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한 손에는 보따리, 다른 한 손에는 내 손을 꼭 잡고 걸으셨다. 새벽 동이 트기 전 공기는 쌀쌀했고 길은 어두웠다. 꽤 먼 길을 걷는 데 난 기분이 좋다. 기억 속 아버지는 종종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커서 좋았고, 내가 큰 이후에는 조그만 아버지가 좋았다. 어떤 날은 너무 취해 얼굴이 피범벅이 되서 들어오신 일도 있었다. 술 때문에 눈이 광인처럼 돌아간 얼굴은 어렸던 나에게 충격이 컸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그런 기억은 잘 떠오르진 않는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고 장기를 좋아하셨다. 수염이 까칠했고 웃을 땐 부끄러운 듯이 웃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평온히 잠든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그 후로 아버지가 눈을 뜨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어떤 외부적 요인이 이러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니다. 라면을 먹다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아버지와 라면을 먹었던 기억은 없다. 길을 걷다가 생각나기도 한다. 뜬금없다는 말이 있듯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난 아버지를 좋아했다. 느닷없이 떠오르는 영상, 아버지와의 일들이 이처럼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암기를 했거나 메모를 했다면 아버지와의 기억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운 것은 언젠가 사라질 테고 메모도 오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너무도 슬픈 일일 것이다. 







 반면, 기억할 이유가 딱히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생각나는 사람도 있다. 그 친구의 기억은 나와 나이가 같다는 것, 여자라는 것 외에 이름도 얼굴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다. 그녀는 나의 20대를 몽땅 가져갔던 누나의 담배 친구였다. 누나와 난 많은 하이라이트를 공유하고 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럴 것이다. 그러니 누나가 가끔 생각나는 것도 당연하다. 한데 이 친구는 좀 다르다. 존재했다는 것 말고는 기억이 전무하다.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마스크를 쓰고 걸어오는 어떤 이와도 다를 것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친구를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잊으려고 기를 쓰지도 않는 것이다. 사라지는 기억으로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내가 작업하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창밖 대로변에 가로수 한 그루가 보인다. 그 나무엔 아직도 죽은 나뭇잎이 달려있다. 누구도 계절이 지난 잎새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겨울바람을 끝끝내 버텨낸 저 잎새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새봄 새잎들과 썩여 또 한 계절을 보내게 될 것인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누나의 담배 친구도 아마 생을 다한 잎새처럼 때를 기다리는 중일 것이다.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여라고 한다. 어떤 여는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여를 만날 때마다 소중한 기억 하나씩을 여에 묻어 두면 좋겠다. 삶이 바다라면 기억은 결국 여가 아닐까.




죠-타이거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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