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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Sep 16. 2020

그땐 그것을 레시바-라고 했다

그땐 그것을 레시바-라고 했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는 세운 상가의 전자 점포 오무사가 나온다. 세운 상가, 지금은 사장된 대표적인 블랙마켓의 거리로 기억한다. 책은 재개발의 시대적 배경이 주로 묘사됐지만, 나에게는 빨간책이라 불리는 음란서적과 불법 비디오, 빽판이라고 부르던 해적 디스크 엘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웬만한 기백과 깡이 없으면 그곳의 음산함에 사지가 굳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항상 해가 뜨지 않는 거리처럼 채도가 낮은 그림으로 기억되는 거리였다. 아주 완벽히 꺼렸고, 평생 갈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랬던 도시를 파나소닉, 소니, 아이와의 이름과 오토리버스, 돌비, 자동녹음의 기능을 살피며 음산한 세운상가를 배회했던 시절이 있다. 90년대였다.



단파 라디오 전성 시절 일본의 전자 제품은 세계를 지배했다. 이후 소니와 파나소닉으로 대표되는 워크맨은 아직도 세계 10대 발명품 중 하나로 명성이 드높다. 일본 전자 시장은 CD플레이어로 다시 한번 세계를 흔들고,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불운의 MD 플레이어다. MINI DISK PLYER란 이름으로 당신 일본에서는 워크맨의 음질 개선과 CD의 휴대성을 개선한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이로써 광디스크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 MD 플레이어를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없다. (지지직거리는 LP를 아직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건전지를 아끼기 위해 카세트테이프 구멍에 플러스 펜을 끼워 빙빙 돌리던 시스템이 좋았다. 플러스 펜이 없을 때는 손가락으로 돌리기도 했지만, 어느 펜을 끼워 돌려도 플러스 펜을 뛰어넘지 못했다.) 온도를 가진 피와 뛰는 심장을 가진 인류에게 광디스크란 문명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지 않은가. 이유라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상당히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프에게 한 개 나에게 한 개 있었다. 지금의 스마트 폰처럼 1인 1개가 기본인 시스템이라 국민의 혈을 빨아먹기에 혈안이 됐던 거대 기업의 효자였다. 한때 그랬다. 하지만 광디스크의 시대는 의외의 상품에 직격탄을 맞는다. 이외의 상품은 바로 대한민국 MP3 플레이어였다. MD 플레이어가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MP3는 가볍고 편리했다. 가벼움과 편리함은 세계 전자 시장을 석권하고 그 중심에는 아이리버가 있었다. 아이리버는 삼성과 엘지의 휴대폰에 먹히고, 휴대폰은 스마트폰으로 진화해 애플과 삼성이 이끌고 있다. 스마트 폰에는 모든 것이 있지만 90년대의 추억이 없다.


 1991년 (아마도?) 제대를 앞둔 선임은 나에게 선물 하나를 주고 갔다. 패나소닉의 작은 포켓용 레시바-였다. 모퉁이 한쪽의 캡을 열고 선을 주욱 댕기면 이어폰이 나온다. 사용하지 않을 땐 이어폰을 잡아 슬쩍 밀어 넣으면 스르륵 감겨 수납되는 첨단 라디오였다. 이어폰 자체가 안테나 주파수를 잡아 끌어온다 해서 기계를 레시바-라고 했다. 리시브가 맞는 표기이지만 어른들은 당시 일제의 영향으로 일본 발음 그대로 레시바-라고 했다. 레시바-는 원래 지금의 헤드폰과 이어폰의 조상 격인 셈이다. 더 포괄적 개념으로는 이어폰을 꽂는 라디오를 레시바-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의 계급은 작대기 2? 아니면 3개를 갖 달고 있었으므로 귀 한쪽을 막고 라디오를 듣는다는 건 부대 동기 전체를 구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모험을 택했다. (나는 모험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야간 보초를 나설 때면 아무도 모르게 포켓의 레시바-를 확인했다. 무기고 앞에서도, 부대의 야산에서도 FM에 채널을 맞췄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기차와 이어폰에서 들었던 제3세계 음악은 다음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야간 보초의 시간만을 기다리게 했다. 각 잡힌 국방부의 시곗바늘도 레시바-를 듣는 시간만큼은 추억만 남는 말년병장의 담배 연기처럼 흘렀다. 레시바-와 함께했던 그런 시간이 좋았다.


 몇 개월 후 점호 시간이었다. 점호 준비의 마지막, 허리를 숙여 바닥의 먼지를 닦아 낼 찰나였다. 그만 포켓에서 잠들고 있던 레시바-가 미끄러지듯 세상으로 나와 버렸다.  그 시간은 슬로모션처럼 느리고 길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그것은 두 바퀴를 구르며 통통 튀어 악명 높은 선임의 군홧발 아래에서 멈췄다. 추억의 레시바-와 이별의 순간이었다.


 도쿄의 아키하바라, 신주쿠, 시부야, 오사카의 전자 상가 거리 니혼바시, 전자 상가의 양대 산맥 요도바시 카메라와 빅쿠 카메라등 일본의 고도성장을 대표하는 전자 상가는 언제나 관광객들이 몰렸다. 나 역시 그곳을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곳에 갈 때마다 생각났던 전자 제품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품이 아니라, 그 시절의, 은근 중독성 있는, 라디오. 레시바-였다.




김택수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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