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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Sep 22. 2020

by 수연

 어제는 실수로 7시간 정도를 지하철에서 보냈다. 외출할 때 거의 책을 가지고 나오는데, 급히 나오느라 챙기지 못했다. 책이 없으니 막막하고 무료했다. 그러다가 책을 안 챙겨서 이렇게 지하철을 7시간 타야 하는 일이 생긴 거다-라고도 생각했다. 핸드폰은 볼 게 없고 배터리도 떨어져 가서 불안했다. 이게 다 책의 탓이다. 웃기는 일이다. 원래 책 가지고 나오는 열흘 중에 칠일은 핸드폰만 보는데 말이다. 책이란 그런 존재인 건가. 지갑 속의 금색 지폐, 가방 속의 호루라기 같은 것.


 중학교 때는 동화 감상문을 쓰는 동아리였고, 고등학교 때는 도서부였지만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교과서와 수능특강보다는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여하튼 대학교에 입학하고는 책과 더 친해지게 되었다. 동기들은 도서관에 잘 가지 않았다. 가도 공부하기 위해 자리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나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학교생활 중 제일 좋아했다. 아싸가 조용히 시간 보내기 제일 좋았고,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고, 다양한 카테고리의 서가들이 나를 합법적으로 숨겨주는 듯했다. 신이 나서 책을 잔뜩 골라 앉아, 몇 장 읽다가 엎드려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고, 어스름한 저녁 가로등 불빛을 쬐며 집에 오는 길. 어차피 읽지 않고 연체될 책들이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이 너무 뿌듯했다. 


 그렇게 책을 대출하는 것에는 성취감을 느꼈으나 본업에는 소홀했다. 자퇴를 결심했던 휴학 시절, 내가 어딘가에서 낙오됐다고 느껴져 절박하게 책을 읽었다. 하루에 한 권 두권 세 권씩. 읽을 책이 다 떨어지면 불안함에 잠을 설칠 정도로 읽었다. 책을 읽다 보니 안 보이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나는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이전에 망했다는 의미 자체가 매우 다양하다는 걸 알고 쫌 놀랐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을수록 희망이 생겼다. 체육대회 단체줄넘기 연습을 하는데 계속 줄이 걸려 욕을 먹어 줄 돌이가 되었더니 다른 애가 대신 욕을 먹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 전해지려나?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 건. 그렇게 책이 보여주는 세계에 매혹되어 책방을 가고, 모임을 가다 보니 자연스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좋아하는 책이 다 다르듯이 책을 좋아한다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대체로 모두와 더 대화하고 싶어 졌다. 편안하고 귀한 인연들을 만나며 내가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각자 책을 읽고 있는 것도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얼마나 억울했을지, 나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


 집에는 많은 책들이 부족한 서가에 방치되어있다. 끼워져 있기만 해도 미소 짓게 되는, 든든한 책도 있고 언제 읽지 언제 처리하지 고민되어 부담을 안게 되는 책도 있다. 언젠가, 좋아하는 책들을 꾸려 내 서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고동색 나무 서가가 가득한, 겨울 아침 볕이 먼지를 비추는 서재. 와인색 투피스 양복을 입고 파이프 담배를 물며 책에 대해 토론하는 머리 벗어진 양반이 있을 것 같은 서재여야 한다. 혹은 잡생각에 책에 집중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뛰어나가 여름 수풀이 둘러싸인 수영장에 티모시 샬라메처럼 누워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여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책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굳이 읽지 않아도 책이 하루의 운을 좌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다.






by 수연

instagram @yoridogjorip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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