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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ul 18.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5

맥락 없이 활자중독

활자중독은 아니지만 은근히 걸려보고 싶은 증상이 활자중독이다. 한 때나마 나에게는 활자중독 비슷한 현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박봉의 월급으로 보상받은 용돈이 5만 원이었던 시절에 나는 5만 원을 아주 유용하게 쓰는 법을 알았다. 사원들에게 요플레 같은 고급간식을 한 번씩 돌리고, 영화 한 편을 보고, 책을 한 권 살 수 있다. 그러면 잔돈이 남는데 이 돈은 모았다가 아내에게 주곤 했다. 이때 사 모은 책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돌이켜보니 당시에 나는 지하철에서 나눠주는 무가지를 꼼꼼하게 읽었고, 피트니스나 신축분양 아파트의 전단지, 영화 카피, 누군가의 메모에도 눈길이 머물곤 했다. 


휴일 날 뭐해요?라는 질문에 공원에서 책 읽어요라고 말하는 지인의 말이 예쁘다. 그렇게 말한 해민은 3일 연속 책방에 와서 책을 고르고 가져온 시집을 읽다가 밑줄을 긋고 또 일어나 서가를 둘러보는 일을 반복했다. 귀여운 모자를 쓰고, 톤이 맞춰진 의상을 입고, 한 손에 책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책장을 넘길 준비를 하는 그녀는 고개를 왼쪽으로 30도 정도 기울여 집중해서 읽는다. 


은근 활자중독이 있어요.라고 했던 해민의 말이 떠오른 건 버스 정류장에 앉아 6분 남은 1132번을 기다리면서였다. 아무런 맥락 없이, 느닷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세계의 비밀이 열리는 순간 인간의 눈을 돌리기 위한 신들의 장난질 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장난에 휘말려 해민의 활자중독이 생각난 건 잔소리 같이 내리는 장마철 출근길이었다. 


장마였고 출근길 버스는 비어있었고, 오늘은 별로 할 일이 없고, 해민은 활자 중독이고, 나도 한때는 글을 꼼꼼하게 읽었고, 세계의 비밀 하나를 놓쳤다. 버스 창에 흐르는 빗줄기에 올라탄 상상은 이토록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무질서의 끝에 나는 오래전 블로그에 올리려다 말았던 짧은 글 하나 떠올랐다. 역시 맥락이라곤 없다.


오픈 정리를 끝내고, 따뜻한 차를 준비하고, 핸드크림을 정성을 다해 바른 다음 책상에 앉았다. 오래전 썼던 글을 소환한다. 대부분 생각나지 않으니 새로 쓰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미녀와 6월 장마

택돌
 
 

이토록 더러운 맛을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역시 사람은 것 모습만 보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목덜미 부근에서 미세한 땀에 의해 소용돌이치듯 말려있다. 가늘고 유난히 맑은 살색의 목은 오랜 시간 공들여 왔던 그녀의 필살기였을지도 모른다. 냉방이 잘 된 책방에서 부드러운 라테를 마실 줄 아는 사람은 미녀였다. 천천히 잔을 내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책의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 단편집 블루&그린이다. 표지는 윤슬의 하이라이트가 독자의 시선을 묶어 둘 정도로 부드럽고 몽환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사람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자신의 문학 소양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보다는 6월의 한낮에 고즈넉한 카페에서 라테를 마시며 버지니아 울프를 읽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셀카와 함께 SNS의 해시태그로 증명하는 타입이다. 사실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문학가이든 인스타그램 중독자이든 어느 쪽이든 관심이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그녀의 피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미인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리고 지금 불과 1,2분 전의 일을 후회하며 빛도 없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구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더럽고 불길하고 비린 맛이었다. 다 쏟고 나니 배가 홀쭉해진 느낌이다. 움직일 힘도 나지 않았다. 투투둑 갑자기 내린 굵은 빗줄기에 정신이 돌아왔다. 잠깐 졸도한 것 같다. 6월 장마가 시작 됐다. 꿉꿉한 땅 냄새가 박차 오른다. 나는 이 냄새가 좋다. 올여름에 장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며 기후 위기를 외치는 기상캐스터를 티브이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래도 난 장마가 좋다. 거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좋은 현상이다. 사람들은 비를 피할 장소를 찾는다. 그럼 이곳에 사람이 좀 많아질 수도 있다. 기운을 짜내서 다시 책방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비유가 상했는지 정상적이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무사히 카페로 들어왔다. 밥맛 떨어지는 제수탱이 여인이 휴대폰의 좋아요 숫자를 확인한다. 그녀의 버지니아 울프는 이제 사망. 사명을 다한 것처럼 엎드려있다. 아무리 천둥 번개가 나데도 이곳 책방은 여전히 사람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역할에 충실한 책방이다. 책방 한 구석에 한 사람이 더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는 다른 느낌의 미녀다. 감이 좋다. 좀 더 다가가 확인해 보자. 그녀 역시 책을 읽고 있었다. 박준의 시집이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습니다를 읽는다. 좋은 시집이다. 취향이 겹친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날아가 앉았다. 혈관을 향해 촉수를 꽂았다. 달콤했다. 케냐 AAA와 에티오피아 원두를 블랜딩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향이 더해졌다. 우리들에게는 목숨과 같은 유명한 격언이 있다. 만족할 때 피해라.

나는 잠시 미녀와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충분한 포만감이 찾아왔을 때 일격이 날아들었다. 미녀는 손바닥에 묻은 핏덩이를 물티슈로 닦아내며 창문에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응시했다. 나의 짧은 생애는 6월 장마를 함께한 미녀와 피를 나눔으로  완성됐다. 만족한 생애였다. 



글을 다 쓰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완결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글쓰기의 법칙이다. 

할 일이 딱히 없고, 해민은 활자 중독이고, 나도 한때 글을 꼼꼼하게 읽었고, 세계의 비밀 하나를 놓치고, 장맛비는 온종일 조잘대는 너무나 여름인, 화요일 글 하나를 완성했다. 오늘 과연 책을 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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