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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ul 16.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4

어설픈데 이게 되네

비가 많이 왔습니다. 며칠 동안 시간을 가리지 않고 줄줄 새는 물줄기와 격투기를 하듯 지냈습니다. 장소는 천장이었습니다. 고개를 바짝 들고 기둥에 매달려야만 하는 장소는 인간에게 아주 불리한 곳이었습니다. 철물점을 일곱 번이나 오가며 4m나 되는 파이프를 손에 들고 이동하는 진풍경은 아무도 관심 없는 공릉동 기네스북에 오를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길이를 가늠하고 파이프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물받이를 연결하는 공사를 했습니다. 설계도와 공사 지식 없이 머리에서 그려지는 대로 마치 3원이요 15원이요 하는 암산 하듯 이미지를 그리며 배수로 두 개를 각각 서가 위와 창가 쪽에 올리고 유속을 고려한 기울기로 물길을 유도했습니다. 마무리 작업으로 철사를 꼬아 배수로가 흔들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딱 봐도 어설픈데 이게 되네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와 놀랐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어설픈데 된다


어설프지만 꾸역꾸역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나는 어설프지만 되는 사람입니다. 희망적인 것 같다가도 불행하다가도 또 그렇게 불행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며칠을 기둥에 매달렸더니 등근육이 욱신거렸습니다. 자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게 뻗었다가 빗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출근하는 일주일이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아침에도 흐린 날을 이유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 장마는 얄궂기만 합니다. 피곤이 머리끝까지 차 올랐다는 몸의 신호를 마음이 좀 알아줬으면 하는 정도로 신체와 영혼이 거리를 두는 현상이 여러 가지 면에서 일어났습니다. 할 일 몇 개를 까먹고 있는데 그게 뭔지 생각날 턱이 없습니다. 그냥 애써 생각해 내려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는 게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이란 변명으로 일관하기로 했습니다.


이럴 때는 보상이 필요합니다.


고기가 적극적으로 먹고 싶었던 건 장담컨대 생을 통틀어 없었습니다. 그런데 S가 고기 이야기를 하자 8 기통 스포츠카가 액셀을 밟은 것처럼 고기 먹고 싶다는 생각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C는 M에게 나는 H에게 연락했습니다. 거의 다짜고짜 오라는 투에 가깝게.


C는 고기 굽는 것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불판에 삼겹살을 올리고 적당히 봐서 뒤집고 자르더니 "이제 먹어도 돼"라고 했고 우리들의 젓가락은 눈앞에 간식을 둔 강아지처럼 달려들었습니다. 된장찌개는 맛있었습니다. 건강한 맛보다 조미료 빵빵한 맛이 지금의 컨디션에 인상적입니다. M은 식사를 했다고 해서 M이 고기를 얼마나 먹을지를 두고 내기를 했습니다. S는 한 개, H는 두 개, C는 세 개, 나는 엄청 먹을 걸 예상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S는 예상대로 젓가락부터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술도 주문했습니다. S는 무엇을 해도 참 자연스럽습니다. H는 분위기를 잘 맞춰줍니다. 청하와 소주 캘리라는 병맥주도 마셨습니다. 처음 보는 맥주인데 맛있어 보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책방 이외의 장소는 주로 분식집이나, 전시장, 가끔 탁구장, 어느 카페 정도여서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고 잔을 놀리는 풍경은 조금 낯설고 재밌었습니다. S와 C는 책방에서 인연이 돼서 어느새 4년 차라고 했고 지구불시착 력으로 S가 직장을 세 번 옮겼던 이야기, H의 꽃 집 사정과 손 다치고 웃었던 이야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큐멘터리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를 했습니다. C는 계속 대장 노릇이 하고 싶었던 건지 퇴직 기념이라며 고깃값도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2차로 M의 작업실로 갔습니다. 나는 잠시 책방으로 돌아와 마감을 하고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M의 작업실은 암막커튼을 사이에 두고 친동생 J의 작업실과 나뉘어 있는데 J의 작업실은 음악 하는 친구답게 베이스 기타 여러 대가 서있고 소리의 울림을 잡아주는 원목 가구와 적당한 조명이 어우러졌습니다. 원탁을 둘러앉은 친구들과 반려견이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처럼 보였습니다. M의 플레이리스트는 분위기를 동그랗게 만들어 주는 마법 같았는데 궁금해서 물어보니 高木正勝타카기 마사카즈란 음악가였습니다. 백색 소음을 멜로디위에 아주 잘 드레싱 한 신비로운 음악이었습니다. 우린 아무런 이야기를 해도 즐겁고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M의 노견 B까지도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다고 하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by 택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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