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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ul 19.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6

비는 망원 여행을 위한 적당한 소품



아내가 만드는 쿠키는 제법 비즈니스 논리와 멀어서 먹으면 배가 부를 정도로 든든하고 견과류를 아끼지 않는 바람에 일단 맛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다. 나는 마감 때마다 쿠키의 재고를 파악하곤 했는데 가게에 쿠키가 떨어진 지 2주가 넘어가고 있다. 쿠키 맛을 본 사람이나 소문을 들은 사람에게 쿠키 주문 가능하냐는 문의를 받기도 한다. 같이 일하는 국순혜 선생님이 가장 아쉬워한다. 쿠키가 며칠째 안 들어오는 이유는 오븐이 고장 나서였다. 아내의 몇 안 되는 낙이 또 하나 지워지는 것이다.


아내는 요즘 걱정이 많다. 책방 수입으로만 감당하기 어려운 융자 폭탄에 직면해 있어 월말이나 월초 월 중간에 카드값이 빠져나갈 날만 되면 한숨이 늘고 말이 없어진다. 이젠 다소 예민해지기까지 하다. 쿠키를 찾는 손님이 늘었다 하면 누구야? 하며 기쁨을 감추려 해도 티가 나는 얼굴을 했는데 이젠 말해봐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븐이 고장 났다는 말은 몇 번을 묻고 나서야 겨우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럭저럭 사업이 유지될 때 나의 전성기 때 샀던 가전제품들이 이제 하나둘씩 가끔 동시에 고장 나기 시작했다. 큰돈이 드는데 돈을 들여서 해결하기엔 수입이 너무 가볍다. 이럴 때는 차라리 기계보다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월요일 휴일 평소라면 아이 학교 보내고 아내와 코스트코에서 장보고 돌아오는 길 국수 한 그릇하고 돌아오고, 미술 학원시간에 맞춰 픽업을 한다. 저녁 먹고 청소하고 나면 얼추 하루가 지나간다.


그런데 요즘 아내는 내가 집에 있어도 말이 없고, 나간다 해도 반응이 없다. 말로만 듣던 가구 생활이 되어가고 있다. 답답하고 한숨이 더해진다. 나는 가방을 챙겨 일어나 책방에 간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책방에서 딱히 할 일도 없다. 어디 갈 데 없을까? 지금의 현실을 잊을 만한 데가 없을까?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어 맨날 책방이다. 사실 한 가지 생각해 둔 곳도 있다. 순심이라면 만나줄지도 모른다. 순심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순심은 책방 친구들 중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가장 똘똘하고 계획이 존재한다. 순심을 아는 사람은 모두 순심을 좋아하게 돼 있다. 순심을 만나면 왜인지 큰 누나를 만나는 느낌이다. 나이는 내가 아버지 뻘인데,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해 주고 밥도 사준다. 배가 너무 고팠다.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순심에게 카톡을 보냈다. 망원으로 나오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한다. 그럼 난 정말 갈게 하고 카톡창을 닫았다. 망원이라면 전철 타고 책 보면서 이동하기에 최적의 거리이다. 나는 적당한 책을 골랐다. 여행과 취미에 관련된 책이 있었다. 그리고 김종완의 단상집하나를 더 골랐다. 결국 김종완 책을 챙긴 건 신의 한 수였다. 여행과 취미는 정보만 늘어놓은 듯한 책이어서 금방 흥미를 잃었다. 종완 책을 곰곰이 씹으며 읽다 보니 순심과 만나기로 한 합정까지 순간이었다. 순심이 말해준 대로 8번 출구로 나가니 교보문고가 바로 보였다. 순심은 작업실에서 입는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나왔다. 검은색 모자를 쓰고 모마 미술관 에코백을 들고 있었다. 외관으로 봐도 그림 그리는 순심이었다. 우린 교보문고에서 책을 둘러봤다. 이것도 순심이 짠 코스의 일부였다. 은지의 여름외투가 메인 진열장에 있었다. 김혼비의 책도 김연수의 책도 보였다. 박상영의 신작까지 있었으나 은지의 책탑이 제일 낮았다. 벌써 네댓 권은 팔려나간 것 같았다. 책탑이 낮아진 건 은지의 여름외투가 유일했다. 나는 은지에게 이 소식을 알릴 생각으로 사진 두어 장을 찍었다. 우린 부러웠다. 언젠가 우리들의 책도 이곳에 있기를 바랐다. 베스트 코너를 지나고 보니 표지에 혼을 담은 책 코너가 나왔다.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둔 책들이 콘셉트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책들 중 몇 권을 사진에 담아뒀다. 가끔 교보에 나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아 베스트셀러로만 승부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처음부터 지구불시착은 콘셉트가 있거나 베스트셀러 책을 파는 책방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지향성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이 많아짐에 금세 난색을 드러낸다. 책을 쉽게 내려놓는 것으로.





책을 좀 더 알아야겠다. 그 정도로 만족하며 교보를 빠져나왔는데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예보는 없었지만 항상 맞지 않는 게 비 예보니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비라고 믿었다. 순심은 우산을 살까? 했지만 나는 그냥 맞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망원 방향으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순심의 계획대로 유니짜장에 가기로 했는데 나는 짜장이 아니어도 좋았지만 짜장이라도 좋았다. 거리는 신기할 정도로 재밌었다. 이국적인 간판이 곳곳에 있었었다. 나는 멋을 부렸어요 하는 간판이 멋을 안 냈어요 하며 눈길을 끄는데 누가 봐도 멋 부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간판은 하수다. 고수는 왜인지 모르게 멋진 것이다. 뉴욕 같기도 했다가 캘리포니아 같았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외국 휴양지의 거리 갔았다. 순심이 저기가 푸하하라고 했다. 크림빵으로 유명한 빵집이다. 내 생각은 크림빵도 크림빵이지만 직관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네이밍으로 유명한 빵집은 압도적으로 푸하하다. 순심이 말한 중국집은 오늘도 휴일이었다. 얼마전 서희와 어렵게 시간 맞춰 갔는데 하필 휴일이어서 못 먹고 다음을 기약했다고 했다. 일부러 영업 시간 검색까지 한 순심은 아쉬워했지만 나는 재밌었다. 순심의 계획은 교보, 지브리 편집샵, 유니짜장, 푸딩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렇지만 비가 내리고 유니짜장은 쉬는 날이었다. 순심은 계획을 세우는 편이고 계획을 세우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나는 계획이 없는 편이고 계획을 세우는데 시간이 필요 없다. 우린 망원시장으로 걸었다. 좁은 골목에 스크램블 교차로가 있고 길 건너편 벽돌 건물 옥상엔 간판은 흰색과 파란색으로 멋을 낸 영문이 쓰여있었다. 영문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관심은 없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은 이상하게 커다란 비보호라고 쓰여있는 도로 표지판이었다. 글자도 굉장히 엉성하게 한국말 하나도 모르는 외국인이 쓴 것 같아 보이는 한글이 이렇게 이국적으로 보이는 동네라니. 재미있어 연속해 사진을 찍었다. 배고픔을 볼거리가 이긴 듯이 보였지만 배고픔의 아우성도 상당했다. 순심은 계획에서 벗어난 유니짜장의 태업으로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좀 도움이 되어야겠다 싶어 바로 보이는 냉면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비도 피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순심은 비빔냉면을 나는 수제비 만둣국을 주문했다. 고기만두도 주문했다. 비빔냉면을 뺏어 먹을 거라는 선전포고에도 순심은 얼마든지 내어준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김치와 무생채가 인상적이었다. 가끔 냉면집은 밑반찬으로 승부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딱 그런 케이스였다. 우린 배를 두드리고 나왔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엄청 퍼붓을 생각이라곤 없는 비는 망원 여행을 위한 적당한 소품 같았다.





의외로 푸딩은 가까운 곳이었다. 커피는 당연히 내가 산다고 했는데 카카오페이나 계좌이체가 되지 않아 순심의 풀서비스가 돼버렸다. 순심이 주문한 아이스라테를  따라 나도 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푸딩하나. 백색의 연유와 커피색의 에스프레소는 시원한 탱고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 순심이 빨대로 휘젓자 백색과 진한 커피색의 탱고는 끝나고 연한 갈색만 남았다. 순심은 라테를 빨대로 저을 때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도 따라 했다. 큰 누나를 따라 하는 것처럼.


푸딩을 먹으면서 나와 푸딩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왜 푸딩인가. 사람들은 내가 푸딩을 좋아하는 걸 안다. 일부러 푸딩 맛집에서 푸딩을 사 오기도 하고, 고단한 일이 생기면 배달옙을 통해 보내주기도 한다. 덕분에 맛있다고 하는 푸딩은 두루두루 맛을 봤다.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푸딩을 좋아하는 일은 맛보다는 루틴에 가깝다. 행복을 맛보는 루틴이다. 사실 그냥 아무 푸딩이면 된다. 싸구려 푸딩이라도 괜찮다. 실제로 푸딩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일본의 편의점 푸딩이었다. 고단했던 하루의 보상!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아주 저렴한 푸딩 하나를 샀다. 샤워 후 푸딩 한 사발이 더할 나위 없는 눈물과 위안이었다.

순심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말을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웃음으로,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고 떠들 수 있게 길을 내주었다.


망원역에서 다시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김종완을 꺼내 읽었다. 집으로 갈까 책방으로 갈까?

책방으로 가서 그림 몇 개를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허무의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잠들어있었다. 또다시 허기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허기는 참 쉽다. 빵이라도 남았을까 뒤적거리다가 아내에게 뭐 없냐고 물었다. 아내는 저녁 안 먹었냐고 하면서 미역국과 총각김치를 내어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1,2위가 고기를 넣지 않은 미역국과 총각김치. 뚝딱 한 그릇 먹고 나서 무슨 미역국이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by 택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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