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Nov 15.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13

그들



지난 월요일은 택수의 생일이었다. 대한민국 나이의 기준이 바뀐 이후로 몇 번째 생일이라고 말하기가 영 귀찮아진 택수는 몇 번째를 생략하고 그냥 생일이라고만 썼다. 그편이 훨씬 간단했다. 글을 쓰고 나서 시간을 확인했다. pm 5시, 해가 빌딩 아래로 기울자 도시의 온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책방 앞을 지나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었다. 동네 책방 8년 차이지만 책을 사러 오는 손님은 여전히 많지 않았다. 택수는 대출이 많다. 월말이면 대출, 융자 등의 협박성 문자 폭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은 국가로부터 '압류'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문자를 받았다. 한숨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저게 모두 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푸딩을 먹었다. 택수에게는 항상 푸딩이 있다. 책 소개에 푸딩을 좋아한다는 글을 쓴 이후, 생일이 다가오면 푸딩 쌓인다. 지난밤 두 개 먹고 오늘 아침에 하나 먹고 아직 냉장고에 4개가 더 있다. 대한민국에서 택수만큼 푸딩을 많이 먹는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푸딩을 한 입 먹고 또 한숨을 쉬었다.

택수는 한숨을 많이 쉬는 편이다. 사람들은 무슨 한숨을 그렇게 많이 쉬냐며 경고한다. 그러면 한숨 쉬면 시원해 라며 답한다. 그런 그를 미워하긴 어렵다는 것이 지인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옆에서 보고 있다면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다. 건물주로부터 퇴출의 메시지를 받고 잔여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그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당사자 택수가 아니라 지인들뿐이었다. 택수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얼마 전 정말이지 아무런 맥락 없이 인터넷에 마라톤 대회 일정을 검색하고 가장 가까운 일정과 코스를 확인했다. 그리고 광진구 마라톤 대회 5킬로 달리기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했다. 일정은 이번 주로 다가왔다. 지인들은 갑자기 웬 마라톤이냐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택수는 이런 지인들의 잔소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아이고야 하면 오히려 신이 나는지 자꾸만 엉뚱한 일을 벌이고 걱정거리를 만들었다.


"제 기준으로 걸으면 10분 걸리고 달리면 15분 정도 걸립니다." 책방까지의 거리를 안내하는 통화를 듣던 연우는 아빠, 거꾸로 말한 게 아니냐며 물었다. 하지만 엄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금 달리면 지쳐서 걷는 데 그게 더 힘들어" 택수에게 있어 최대 장거리 달리기는 횡단보도 위에서 3분의 2지점이 고작이다. 어김없이 나머지 구간은 걷는다.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어도 걷는 것이 철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리기를 피했다.


완주하면 묵직한 메달을 받는다. 달리기를 신청한 이유는 메달이 받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조금 닮아보고 싶었다. 하루키 달리기 하루키 달리기 이 미묘한 발음의 조화가 입에 착 달라붙어 알려지지 않은 뇌세포에 의해 전두엽으로 옮겨가 달리기를 신청하게 만든 거라고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루키처럼 달리기를 잘하면 글도 잘 쓰게 될지 모른다. 전후가 바뀌어 인과관계라고 성립되지 않는 현상을 사람들은 기적이라 부른다. 택수는 이제 노력보다 기적을 선택하는 편이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기적이 한 번쯤 일어날 때가 됐다는 것에 스스로 동의했다. 오늘도 손님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밖이 컴컴해지고 책방의 노란 불빛이 속살거릴 때면 특히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 시간은 혹시 모를 사소한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믿었다.


오늘 책방 손님은 한 명이었다. 책방을 조금 둘러보고 아무 말 없이 들어온 곳으로 나갔다. 택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었다는 인상만 남기고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갔다는 표현보다 어둠 속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된 것처럼 보였다.


밤이 깊어졌다. 막차 시간에 맞춰 책방을 나왔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간혹 달리기도 했다.







비론  모레노는 축구 선수로나, 심판으로나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선수 시절 잦은 부상이 많았고, 심판으로서는 비교적 긍지와 자부심을 갖췄지만 큰 시합에서는 구설에 오르는 일이 서너 번 일어났다. 그 서너 번의 큰일이 심판으로서의 업적을 모두 가져가 버린 동시에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로 만들기도 했다.

모레노는 에콰도르 키토에서 태어났다. 에콰도르는 갈라파고스의 나라로 에콰도르의 대통령보다 갈라파고스의 바다 이구아나가 더 알려져 있다. 비론  모레노는 축구와 동물을 좋아했다. 에콰도르의 모든 어린이는 커서 축구와 수의사, 가톨릭 사제 이외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하늘 보기를 좋아했고, 가끔 시를 썼다. 문학적으로도 재능을 보였지만, 노동자의 가정환경에서의 문학은 토스트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 먹는 것에 약간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구박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까지 나서서 거들먹거렸다. 비론 모레노는 작은 생명들의 소리를 듣는 일은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또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소년이었다.


코파 주니어 대회 결승전, 모레노는 팀의 운명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팀의 최전방에서 발끝의 날카로움을 자랑하던 모레노는 역습의 끝에서 동료의 절묘한 어시를 받았다. 발끝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공을 가볍게 방향만 바꾸는 인사이드킥 한방으로 우승 트로피와 보상으로 주어지는 팀 전원의 축구화를 받을 수 있었다. 종료를 10여 초 앞둔 절호의 찬스 모레노와 골키퍼 사이를 막는 수비수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레노의 시선은 공이 아닌 하늘로 향해 있었다. 석양을 항해하는 철새들의 무리가 아름다웠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공은 모레노 발 앞을 그대로 지나 골키퍼의 손에 안겼다. 심판은 고개를 기웃 뚱하고 게임 종료를 선언하는 휘슬을 입에 물었다. 곧바로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모레노는 상대를 속이는 킥으로 골을 갈랐지만 동료들의 연이은 실축으로 승부는 패배로 결정됐다.

그 사건 이후로도 축구는 계속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구스틴 델가도와 함께 청소년 유망주로 성장할 기회도 있었지만 발목 골절, 십자인대, 햄스트링 부상의 악재로 선수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모레노의 아버지는 지인의, 지인의, 지인인 에콰도르 축구 연맹의 사무처장에게 15년 치 비상금을 상자에 담아 보냈다. 그리고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연맹으로부터 심판 자리가 하나 남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모레노는 2002 한일 월드컵 심판단 자격으로 대한항공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1997년 국제 심판 자격을 취득한 후 많은 국제 경기를 치렀지만 아시아는 짧은 여행차 가본 싱가포르가 전부였다. 대부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 코파 아메리카노 정도였다. 모레노에게 배정된 경기는 D조 미국과 포르투갈 경기와 8강 한 경기였다. 기내에서 제공되는 서울 가이드북 모닝 컴을 꼼꼼히 읽었다. 2002 한일 월드컵 특집 기사의 대부분이었다. 모레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6,25 전쟁의 전후 이미지가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참가자였다. 늘 한국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 하셨는데 그것은 한국에 대한 오해의 시작이었다. 이 조그마한 잡지로 국가의 규모, 경제, 문화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다. 모레노는 삼성과 엘지를 일본 기업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엘지 휴대폰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됐다. 모레노는 손을 들어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그리고 면세품 잡지에서 선물용 초콜릿을 두 개 주문했다. 아름다운 승무원이 공손히 다가와 유창한 영어로 응대했다.


한국의 밤은 대단했다. 공항을 거처 숙소까지 오는 과정에서 고향 키토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름 모를 간판이 알록달록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한국의 밤에 대해 소감을 묻는다면 무질서를 넘은 질서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겠지만 아름다운 것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간단한 짐을 풀고 기내에서 구입한 초콜릿과 커피를 들고 호텔 거실의 창 앞에서 수원이란 도시를 내려다봤다. 경기가 치러질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조명탑이 압도적으로 밝게 위용을 뿜어낸다. 지난밤 한국은 폴란드를 2대 0으로 승리했다. 고무된 시민들의 함성이 밤의 적막을 뚫고 간간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구호에 어느새 익숙해진건지 모레노는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미국과 포르투갈의 경기는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는 한국의 승리. 8강 진출 팀은 한국. 우승 후보 국가들에서 언제나 이름이 빠지지 않던 루이스 피구와 그의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모레노는 제발 개최국 경기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거칠기로 소문난 이탈리아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외신은 한국팀의 선전과 서울광장의 붉은 악마들의 인파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늦은 시간까지 CNN 티브이를 보던 비론 모레노는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러 티브이를 껐다. 내일 지구 최대의 격전이 치러친다. 굉장히 거친 시합이 눈에 훤했다.


대전, 이 도시는 말 그대로 미쳤다. 대~한민국! 의 구호가 언제 어디에서라도 울려 퍼졌다. 기내에서 확인한 대전이란 곳은 사건 사고가 없는 조용하고 재미없는 도시란 말은 거짓이었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차량 정체는 미친 듯했다. 택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초조함으로 숨이 막혀왔지만, 월드컵 이야기가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의 운전사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도 미소가 끝나지 않았다. 비론 모레노는 성호를 그리고 머리를 감쌌다. 그때였다. 윙윙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경찰 오토바이 서너 대가 나타나 막힌 도로를 뚫었다. 도로가 양옆으로 시원하게 갈라졌다. 경찰 한 명이 다가와 내 얼굴과 운전기사를 한 번씩 훑고 경기장을 가리켰다. 운전사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경찰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를 알 수 없었지만 운전사는 어딘가 모르게 들떠있었다. 운전석으로 되돌아온 그는 "오케이 돈마인"이라고 필요 없을 만큼 큰 몸짓으로 보디랭귀지를 시전 했다. 경찰은 호각 몇 번에 도로를 가르는 마법을 부렸다. 오토바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경기장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도착했다. 무려 15분이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들이 어떻게 나를 찾아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기내 잡지에서 본 IT 강국 대한민국이란 기사가 떠올랐다. 혹시 위성으로 내 위치를 감시하는 걸까? 하며 약간은 무섭기도 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운전사가 빠르게 다가와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양손의 엄지를 세우고 짧은 영어로 폴리스폴리스 미 텔레폰 하며 오버스런 동작으로 자신을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대한민국 승. 모레노는 이탈리아 선수 두 명을 퇴장시켰다. 이탈리아는 불같았다. 한국이 심판 매수에 성공했다며 비난을 쏟아냈다. 살인 협박 편지도 받았다. 반면 한국에서 난 영웅이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날의 판정에 대해 함구하는 눈치였다. 훗날 한국의 공영방송과 이탈리아 방송에서 취재 경쟁이 이어졌다. 모두 귀찮았다. 심판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다. 실수를 절대 범하지 않는 인간은 3종류만 있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 죽은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한국은 운이 좋았고 이탈리아는 이길만한 경기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비론 모레노는 시합 중에 여러 번 한눈을 팔았다. 구장의 함성, 붉은 물결, 깃발 이런 장면은 나에게 영감을 준다. 심판으로써 뛰는 내내 시인이 되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찬란했다. 모레노는 그들에게서 분명한 에너지를 느꼈다. 이 시합의 결과로 인해 다수의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것이 공정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축구로 인해 생기는 이 아름답고 선명한 결과물에 신의 가호 한 방울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 경기였다고 생각했다.


비론 모레노는 현재 축구를 멀리하고 시집과 소설을 읽으며 살고 있다. 모레노의 판정에 관해서는 비교적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심판이라는 평이 남았다.






"실수를 절대 범하지 않는 인간은 3종류만 있는데, 그것은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 죽은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야." 연우는 이렇게 말하고 현관문을 거칠게 닫았다. 초등학교 5학년이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는지 현주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승민이는 이미 운동 나갔고, 연우가 등교했으니, 이제 저 인간 하나가 남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달리기를 해놓고 저렇게 3일째 시체처럼 누워만 있다. 고작 5킬로를 달리고 누가 보면 국토 대장정을 마치고 온 사람처럼 송장이 돼가고 있다. 밥을 차려도 먹지도 않는다. 그래도 귤을 까먹는지 외출했다 돌아오면 귤껍질이 굴러다녔다. 현주의 일과는 3부로 나뉘는데 연우가 등교하면 1부가 끝나는 셈이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제 곧 2부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다. 쿠키를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해야 한다. 오랜만에 쿠키와 휘낭시에 주문이 들어왔다. 택수의 책방 지인이 대부분 고객이지만 맛이 좋다는 소문은 자자했다. 남아있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계량기와 반죽기, 호두, 마카디미아넛츠, 무화과와 설탕 등 재료를 하나씩 준비할 때 전화가 왔다. 대희다. 꿀알바가 하나 있는데 지금 바로 시립미술관으로 나올 수 있냐는 것이다. 오 관장님을 만나서 대희 소개로 왔다고 하면 된다고 했다. 자기도 가긴 할 건데 촬영이 끝나야 움직일 수 있어서 시간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쿠키 재료를 꺼낼 때의 역순으로 돌려놓았다. 대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엑스트라 연기를 꽤 오래전부터 해 왔다. 이제는 웬만한 배우들과도 말을 트고 지내며 얼마 전에는 설경구와 포장마차에서 술도 마신 사이라며 자랑도 했다. 최수종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왕의 분장을 한 최수종과 포졸 복장의 대희가 묘하게 어울렸던 기억이 났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방 안을 둘러봤다. 택수는 아직 변화가 없다. 줄곧 한 자세로 누워 코를 골다 말다 한다. 수족관에 다가가 구피들에게 먹이를 주며 잘 먹는, 구피 못 먹는 구피, 관심 없는 구피를 꼼꼼히 살폈다. 나갔다 올 테니 집 잘 보라는 눈빛이었다.  


시립미술관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버스를 타도 시간 차가 크지 않고, 차를 타고 나가면 주차비가 아까웠다. 현주는 미술관 알바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어느 미술관에 가더라도 그들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손님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심심한 일을 하고, 보상으로 고액의 일당을 받는다. 어떡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면접은 아주 쉽게 끝났다. 특별한 주의 사항도 없고 시급과 일정만 통보받았다. 간단한 계약서도 썼다. 겨울 내내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한 특별전은 요즘 유명한 핀란드의 아티스트였다. 매우 까다로운 이름이어서 기억할 수 없었지만, 도록에서 본 사진은 영화 트와일라잇에 나온 차가고 아름다웠던 배우를 닮았다. 그의 그림은 엄청나게 큰 그림들인데 특이하게도 어떤 형태를 그리지 않고 모두 완벽한 색을 그린다고 했다. 가장 완벽한 블랙 벤타 블랙과  울트라 화이트 페인트 같은 본연의 색을 그린다고 관장님은 말했다. 현주도 거대한 색이 궁금했다. "실제로 보면 굉장히 빠져들 것 같아요." "저도 기대가 크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관장은 예의는 여기까지라는 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바쁜 걸음으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대희는 끝내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택수는 여전히 미동도 없는데 귤껍질은 식탁 위에, 침대 옆에, 컴퓨터 앞에 하나씩 놓여있었다. 현주는 다소 높은 톤으로 경고를 날렸다. "인제 그만 일어나라!" 택수가 끙끙거리며 일어나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돌아가 누워버린다.  


다음 날, 대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마침 근처에서 새벽 촬영을 끝내고 지금은 커피 마시고 있다며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현주는 미술관 아르바이트 소개받은 답례도 할 겸 쿠키 몇 개를 들고 나갔다. 대희는 대뜸 이번 연기는 대사도 좀 있고 주연과 함께하는 씬도 많다며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았다.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한 친구다. 대희는 엄청난 엘지 야구팬이기도 해서 엘지 투수와도 술을 마시는 사이라며 사진을 보여줬다. 요즘 엘지는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라며 들뜬 얼굴이었다. 모든 말이 진실인데 모든 말을 거짓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대희의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말이 너무 점프가 심하고 장르도 다양해서 종잡을 수 없었다. 계속 웃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대희는 미술관 알바에 대한 조언도 해줬다. "미술관 알바도 했었어?" "했었지, 언제였더라"로 시작한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프라하 공원에서 낮잠을 자다가 배낭을 통째로 도둑 맡고 막막하던 때 우연히 단기 직원 구한다는 미술관 포스터를 보고 지원했다가, 마침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유로 일사천리로 채용됐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인은 보이지도 않고 외국인만 오는데 다가와 물어도 당황하면 안 된다고 했다. 언어는 자신감이니까 아는 단어와 보디랭귀지를 섞어 설명하면 웬만하면 다 통하는 법이라 했다. 이 이야기만 해도 킬포가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대희, 영어 잘해? 프라하도 가봤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런 사람들 특징이 물어볼 틈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야기는 계속 다른 곳을 향해 달린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택시 운전을 했는데 외국인 심판이 탔다는 것이다. 대전 경기장으로 가는데 차가 하도 막혀서 초조해하길래 경찰에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좋은 일이라 생각하면 당황하지 말고 일을 진행하라는 단순한 조언도 덧붙였다. "택시 운전도 했다고? 심판인지 어떻게 알았는데?" 짧은 문장에도 질문이 서너 개쯤 생기게 만드는 것도 대희의 독특한 화술이다. "택시 운전! 했었지 내가 말 안 했나? 심판인 건 딱 보고 알았지! 피파 어쩌고 쓰여있는 명찰을 걸고 있었는데 경기장으로 가자 하고 시간을 연신 확인하는데, 시간확인 하는 폼이 꼭 심판 같더라고" 대희를 보면 어처구니없기도 한데 모든 일이 그가 짜놓은 판에 맞춰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한결같이 긍정적인 태도였다. 그리고 갑자기 택수 이야기를 꺼냈다. 정색을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런데 택수 괜찮아?" "택수? 자고 있는데 왜?" "얼마 전 광진구 육상대회 참가했더라? 내가 거기서 응원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는데 택수가 있더라고, 택수가 운동을 좀 했던가? 생각이 들었는데 폼이"까지만 말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현주는 더 궁금해져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니 나 처음 봤어. 있잖아, 이제까지 육상 운동 알바를 몇 번 해왔는데 청바지 입고 달리는 사람 처음이야. 또 상의는 얼마나 껴입었는지"까지 말하고 또 얼굴이 새빨게 질 정도로 폭소를 하는 것이다. 현주는 대희가 진정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대희는 시간을 확인하고 엇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며 하던 말을 멈추고 나 이제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홍대에서 듀스 팬클럽 정모 갔다가, 덕수궁 해설사 모임 오리엔테이션에 가야한다며 헐레벌떡 짐을 꾸리며 한마디 더 한다. "아 택수한테 잘 해줘" 갑자기 무슨 반전인지 정색을 하는 말에 당황한 현주는 "어" 라고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아 맞다! 이거" 준비한 쿠키를 건넸다. "별거 아니야 집에서 만든 건데 사람들이 가끔 주문해서 남는 거 가져왔어" "너 요즘 쿠키 만들어? 이거 정말 힘든데 나 제빵사 자격증 있잖아. 그런데 너 쿠키 만드는 이유가 그거 아니야? 답답한 일 잊기 위해서?" 현주는 깜짝 놀라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쿠키 배우는 사람들 대부분 그래. 현실은 괴로우니 잊고 싶은 걸 찾는 거야.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되고 그 한 가지 뭔지 알지" "맛있게 돼라." 대희와 현주는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또 웃었다. "아마 택수도 그랬을 거야. 달리기 하는 것도 무념무상에 딱 이거든. 보통 뭐든 하나만 생각하고 달리는데 택수는 있잖아?" "뭔데?" 대희는 또 대답보다 웃음을 터뜨리면 당시 상황을 이야기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청바지 입은 참가자가 달려오는데 코스변에서 주자들에게 화이팅을 외치던 일을 맡은 대희가 택수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택수는 대희를 못 보고 지나가길래 인사나 할까 하고 뒤를 따라갔는데 뭐라고 중얼중얼하며 달린다는 것이다. 들릴락 말락한데 현주 어쩌고 승민 어쩌고 그러는 거란다. 그래서 좀 더 다가가서 귀 기울여 들었더니 구령을 맞춰 걷는데 온통 가족 생각뿐이라며, 현주 사랑해, 승민 괜찮아, 연우 귀여워, 그러면서 미안해, 사랑해, 하면서 달리는데 너무 감동이어서 괜히 눈물이 나와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희는 엘지 유광잠바를 입고 등에 있는 임영웅 사인을 자랑하며 지나가는 버스를 쫓아 뛰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니 택수는 없었다. 귤껍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방 청소를 했는지 침대 시트도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빨래 건조기에 빨래들도 전부 개어져 있었다. 현주의 하루 2부를 시작하기 위해 차 한 잔을 준비했다. 그 건 워밍업 같은 의식이었다.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진열장 손 고리에 무언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광진구 육상대회 완주 매달이었다. 현주는 메달을 들어 목에 걸어보고 메달이 어울릴 만한 곳을 찾아 방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결국 진열장 손 고리에 걸어두었다. 거기가 제일 어울리는 장소라는 것을 택수가 말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택수

instargram @illruwa2



























     

매거진의 이전글 주머니 속의 장르 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