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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Oct 31. 2023

주머니 속의 장르 12

계동 달님에게


요즘은 계동이 좋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계동에 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난번 지인 옥인동강의 전시로 오랜만에 계동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낮달이 선명했던 8월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이 책방에서 사라지고, 책방이 아닌 시간은 집에서 흘려보낸다. 외출의 기회가 흔하지 않은 이유로 약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여행이란 감성이 딱하고 달라붙곤 한다. 여행은 계동에 도착해서부터 시작이 아니다. 약속이 잡힌 이후부터, 가방을 꾸리는 순간에도, 전철을 타는 순간도 설렘은 이어진다. 


수잔은 그림을 그린다. 나는 수잔의 그림을 볼 때마다 시간을 느낀다. 수잔의 그림에는 그가 손에 쥔 컵을 내려놓는 속도처럼 느리게, 테이블과 잔이 접촉하는 기다림처럼 다정하게, 아주 은은하고 충분히 내밀한 감각이 스며있다. 나 말고도 수잔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럿 있다. 갤러리 골든핸즈프렌즈의 딜러도 수잔의 그림을 오랫동안 눈여겨 온 관계이다. 골든핸즈프렌즈는 올해 초 계동 한옥에 창창당이라는 갤러리를 새롭게 오픈해 작가 초대전을 이어가고 있다. 옥인동강에 이어 수잔이 창창당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전시 오프닝을 겸해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고 잔잔한 이야기를 나누는 찐빵토그가 있는 날이다. 며칠 전 수잔은 오프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며 빌려간 이야기를 받으러 온 사람처럼 책방에 찾아왔었다. 나는 이런저런 말을 막 던졌는데, 그것이 수잔의 아이디어와 결합해 찐빵 토크가 됐다. 오프닝 행사를 전시 시작일이 아닌 내가 쉬는 월요일로 잡은 이유도 나를 토크에 섞으려는 수잔의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난 계동으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 있을 것이다.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 그림으로 만난 사람들, 친구, 친구의 친구. 잘 알지 못하더라도 아는 만큼 좋은 사람들이 수잔의 찐빵 토크를 위해 모인다. 수잔의 그림을 보기 위해, 수잔이 주눅 들지 않게 하기 위해, 수잔을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창창당 갤러리에 오기종기 모여있을 것이다. 계동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군데군데 가게마다 수잔의 포스터가 보인다. 모두 알지 못하는 가게지만 포스터 한 장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반가움이 더 한다.


세세히 들여다보면 세련된 가게가 늘었다. 도로에는 촛불을 켜둔 것처럼 빚 나는 노란색의 LED라이트가 사람을 유혹한다. 골목은 세월의 발자국을 지우고 관광객 무드에 어울리는 거리로 적응하고 있었다. 다행히 골목의 원형은 내가 알던 시점으로부터 대부분 그대로였다. 덕분에 오른쪽으로 넘어가면 원서동, 왼쪽은 북촌 하며 머릿속에서 지도가 그려졌다.


태양빛이 물러난 거리는 짙은 어둠으로 채워지고 푸른 하늘과 명도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명도차이로 인해 10월의 가을은 해 저무는 시간이 일품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조명과 간판이 할 일을 시작하면 지나는 사람은 모두 푸근한 불빛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계동은 밤이 깊어도 사람들의 소곤소곤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마을일 것이다. 천장이 낮은 조그만 입구를 통해 수잔의 윤슬 그림이 먼저 보이고 차례로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SH, SS, Y였다. 


인사를 나누고 잠깐 산책 겸 계동길을 걸었다. 나에게는 한 평도 허락하지 않는 부러운 가게들이 많았다. 질투가 나서 갤러리로 돌아와 잠깐 벽에 기대선 우리 일행은 잠깐이나마 계동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일렬로 늘어선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에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전시를 보고 나온 사람도, 무슨 일인지 골목을 들어온 사람도 늘어선 줄이 페이크인지 알면서도 열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들어낸 우연이 골목에서 웃음으로 피어올랐다. 웃음을 따라 올려본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청량해 시력이 닿는 곳은 우주의 속살이 아닐까 하는 신비로운 거리감이 느껴졌다.


조그마한 마당 한가운데 테이블을 두고 열댓 명이 조밀조밀 꽉 차게 앉았다. 수잔은 준비한 4절 크기의 도화지를 펼치고 나를 앞으로 불렀다. 나의 역할은 거치대였다. 수잔스 브리핑이 시작됐다. 수잔이 좋아하는 글과 시를 읽고, 싫어하는 상황가 모두가 조심해야 하는 에티켓을 이야기했다. 백미는 수잔의 작품과 참석자의 일대일 그림 매칭 시간이었다. 나는 전시 제목이기도 한 오래오래 그림과 매칭되었다. 수잔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오래오래란 말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책방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는 쓴 기억은 나는데 수잔의 오래오래는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부끄러웠다. 수잔은 모든 참가자에게 자신의 그림을 설명한 후 매칭을 성사시켰다. 제법 순발력도 필요해서 걱정이었는데 수잔의 설명은 무난을 넘어 모두를 만족시켰다. 찐빵처럼 따뜻한 토크였다. 도화지 맨 뒷장 뒷면에는 스페셜 땡큐 택수 사장님이라고 쓰여있었다. 그건 거치대를 수행하는 나만 보였다. 나는 맨 뒷장의 뒷면이 보이지 않도록 토크의 뒷마무리를 서둘렀는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해서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찐빵과 맥주, 호두 어리, 휘낭시에와 수제 쿠키를 먹었다. 그리고 분위기에 취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무리는 둘로 쪼개졌다. HM과 SS, Y와 SH, 나는 헤어짐이 아쉬워 어니언이라는 한옥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기와지붕아래서 넓은 툇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아 허한 하늘을 혼자 다 쓰고 있는 달을 바라봤다. 아름답고 아무런 걱정이 없는 달은 누군가가 아닌 모두의 얼굴을 합쳐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달을 보고 나는 뜬금없이 싸늘한 개그를 던졌다. 

"너네들 달에 힘이 생기면 뭔지 알아?" 

...

"달력"

누군가 기발하다고 했는데 잘 듣지 못했다. 아마도 SH일 것이다. SH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대답을 찾아준다. 사려가 깊다. 그 마음이 고맙다. 

무리가 있었는데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 이 친구들과 함께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고 달에게 기도했다. 달은 아무 대답도 없이 장애물 없는 밤하늘을 조금씩 이동했다. 왠지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를 들어줄 것 같기도 했다.




김택수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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