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흰 종이 앞에서 어디서부터 선을 그어 시작을 할지, 왼쪽 위에서 시작할지 종이의 맨 아래쪽부터 시작할지 크기는 어떻게 할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이때 망설이며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흰 종이는 머릿속을 하얗게 정지시킨다.
아마도 한 번쯤 빈 원고지 앞에서 글을 써야 할 때, 스케치북 앞에서 그림을 그릴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백지 공포증이라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로 누구에게나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잠시 멈춤 현상을 지나 보낼지, 거기에서 멈춰 빈 종이로 3끝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머릿속에 뚜렷한 이미지가 있어서 손으로 그것을 구현해 낸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영영 아무것도 창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갑자기 자다가 떠올라서 일어나 곡을 쓴다던 한다던 어느 유명 작곡가는 표절에 휘말리기도 했다. 갑자기 떠오른 그것은 평소에 듣던 누군가의 곡이었던 것이다.
창작을 멋진 이미지가 짠하고 떠오를 때 그걸 종이 위에 쓱쓱 그려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영감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나타난다는 설을 들어보았으나 현실에서 아직까지 듣거나 본 적이 없다. 직접 그 영감을 볼 수만 있다면 대단한 작가가 되었을 텐데 하며 무릎을 쳐 봤자 나에겐 그런 분은 오신 적이 없다. 아직은...
어느 날 눈앞에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나와 손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막막함과 막연함이 스스로를 잠식시키기 전에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채 백지 위의 영감을 기다리다 보면 빈 종이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를 탓하고 자신감마저 떨어져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얼마나 어떻게 기다리면 그 생각이라는 것이 생각날까? 고개 숙여 종이를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림은 두둥 하고 나타날까?
그분이 오신다는 표현을 들었다. 누구는 그분이 와서 멋진 작품을 만드는데 그분이 오시지 않으니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기다리다가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물이라도 떠놓고 달님을 보고 빌면 그분이 떠오르시려나. 그렇게 된다면 매일 밤 달님만을 보고 빌 텐데, 그 정도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글은 약간의 과장을 아니 심한 과장을 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맴도는 단어를 적어보자 그리고 그것을 일단 그리자 그게 마음에 들던 그걸 그리려던 게 아니라는 내 마음속 외침은 잠시 덮어두고라도 말이다. 일단 그 첫 번째 시작을 하고 나면 그다음 그려질 것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생각날 것이다. 한번 해보자. 잘 안되더라도 일단 하나는 그렸으니 시작을 한 것이다. 시작을 하는 것과 백지를 앞에 두고 그분을 기다리는 것 사이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일단 그리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채 백지 위의 영감을 기다리다 보면 빈 종이의 무게에 눌려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 못생기고 어눌한 무엇이라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걸어서 앞으로 움직여야 함몰되지 않는다.
일단 나가서 걸어보자 걸으며 맴도는 한 단어를 떠올리는 것부터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