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만 있으면 그림 잘 그릴 수 있을 거 같은데


4151848996_f3ed47e7de_o.jpg 거실 한구석 작업실 20007

친구의 아이패드와 아이펜슬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왠지 아이패드가 사고 싶어 졌다.

인스타그램의 그림 그리는 모든 이들은 아이패드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나만 빼고 다 있다니

이건 상대적 박탈감인가?

테크놀로지를 따라가지 못한 사람의 불안일까?

나도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한동안 휩싸였지만 가격은 내 가슴을 금방 급속으로 식혀주었다.


아티스트들을 보면 그림 같은 아름다운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무 바닥, 큰 책상과 책장, 작업하던 것들이 그대로 잠시 멈춤 상태로 어지럽혀져 있지만 더러워서 치울 것이 아닌 나름의 규칙이 있는 곳, 그 사이엔 아름다운 도자기 화병에 튤립이 풍성하게 꽂혀 있고 그 옆으로는 마시다 만 머그잔에 밀크티가 있고,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방 안 구석까지 밝히고, 창문 밖은 큰 나무들이 우거진 그런 곳 그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실만 있다면 아마 나도 저런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왠지 작업실이 있으면 위대한 걸작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상상했던 적도 있었다.


10년 정도 그림을 그렸는데 2년은 부모님 집 내 작은방에서, 온갖 종이를 날리며 벽에 붙여놓고 미뤄놓고 잠을 자기도 했고, 잠깐의 깨끗함과 지속적인 더러움 속에서 지내는 나를 그저 더 한심하게 보이게 하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더러운 게 아니라 물건이 널려있어 정리 안된 것뿐이라 해명해도 별 차이는 없었다.

작업실 1


작업실이라는 것은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가 다음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서 어제 하던 것부터 이어서 계속 진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잠자는 방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그게 어려웠다.

방문 밖에서 언제든 연결되어있는 공간을 피해 나는 나 혼자 소음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는 생각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집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골목 안 상가건물 1층에 첫 작업실을 만들었다. 보증금 없는 건물에 월세를 3층에 사시는 주인 할머니께 내면 되는 것이었지만, 매달 월세를 낼 수 있을지 벌이에 대한 의문과 주인 할머니에게 매번 돈을 직접 가져다 드릴 생각을 하니 안 되겠어서 12달치 연세를 내도 되냐는 딜을 했다. 그럼에도 주인 어르신은 종종 들려서 궁금해하시긴 했지만 방해를 하시지는 않았다. 춥고 더운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해방감을 맞았다.

작업실 2


그 후

나는 아주 작은 집으로 독립했고 작은 집에 알맞은 폭이 좁은 책상을 놓고 작업했다.

답답하거나 잘 되지 않는 날은 국립 중앙도서관에도 가보고(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못되었다) 예술의 전당 안 도서관으로도 출근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원고를 읽는 일의 경우 집에서는 조금 읽고 딴짓하느라 읽히지 않던 것들이, 카페에 가면 2-3시간 동안 술술 읽히기도 했다. 읽으며 스쳐가는 이미지들을 원고 위에 러프하게 스케치하기도 하고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갔다.

작업실 3


그러다 전에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가 작업실 메이트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 나 나나나"

여기 무조건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여건이 되지도 않았지만 어떻게 하다 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바로 듣자마자 그날로 공동작업실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작업실은 방 3개짜리 마당이 있는 한옥이었고 한방은 책 디자이너 다른 방은 번역가 선생님이 사용했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기도 받기도 하고 모두 프리랜서 이기에 방해되지 않는 개인적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작업실로서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늘 그랬지만 쪼들리는 무명작가는 3달이나 작업실 임대료를 밀리는 날도 있었는데도 눈치 주지 않는 작업실 메이트 덕에 마음 편히 그림을 그렸다. (눈치 줬는데 눈치가 없어 몰랐을 수도 있다.) 서촌이라는 작업실의 위치도 살고 있는 집보다 훨씬 넓은 한옥이라는 공간도 마당도 마당의 고양이도 식물도 같이 사용하는 사람들도 좋았고 매일 출근한다는 사실도 만족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대작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꾸역꾸역 몸을 끌고 나가 일하는 모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하다가 밥을 먹고 일을 조금 하고 인왕산 계곡을 산책하고 집으로 퇴근했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피곤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마감에 닥쳐서야 스스로 판 무덤 안에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늦게까지 손가락 마디가 저리게 그림을 그리곤 했다.

작업실 4

6.jpg

3년이 넘게 그곳에서 보냈지만 결국 또 경제적 어려움은 내 앞길을 자꾸만 막았고 나는 결정해야 했다.

모든 짐을 싸 짊어지고 다시 작고 작은 나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또 적응하며 그림을 그렸다.

다시 작업실 3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있건 없건 말이다.

멋진 작업실을 만들 수 있다면 최고로 좋겠지만 없다면 내 공간 안에서라도 집중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보자.


모두가 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매우 뛰어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작업실 같은 게 없어도 식탁 한쪽에서 글을 쓰고 아이를 돌보다가 재우고 돌아서 다른 방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다작을 또 좋은작품을 만들어낸다.


멋진 내 공간이 있다면 좋겠지만, 가능하지 않다면 집안에서라도 잠깐이라도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공간이 안된다면 시간, 조도를 맞춘다거나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커피나 간식 어떤 때 내가 집중이 가능한지를 찾아야 한다.


언제 그림을 가장 많이 집중해서 그렸나 생각해보니 혼자 제주로 10일간 여행 가서 한 곳에서 많은 이동 없이 지냈을 때였다. 낯선 곳에서 집에서 느끼는 불안과 걱정을 잠깐 잊고 혼자 떠돌다 숙소에 돌아와 내 흔적은 남기고 싶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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