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냉장고

너 채우고 나 채우고

by Illy

며칠 정신없이 지냈는데 그 사이 장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쟁여놓은 음식이나 재료, 시댁에서 주신 김치, 밑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장 보는 수 십 분을 아끼는 생활을 보냈다.


있는 재료로 먹게 되니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원래 하던 장보기라는 일을 안 하니 허전함과 비슷한 감정도 조금은 있었다.


이럴 때 해결법은 냉장고를 채우는 것 말고는 없다.

못하고 있었던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마트를 좋아한다.

원래 일본에서도 엄마가 마트로 간다고 하면 살 것도 없는데 따라가는 편이었고 해외여행을 가도 꼭 주택가에 있는 마트를 가보았다.

일본에서는 몇 번을 가도 처음 보는 것 같은 색다른 과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외국에서는 알록달록한 과일이나 어떻게 먹지? 싶을 정도로 설탕 범벅인 빵들을 보는 것도 즐겁다.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느껴져서 좋다.


지금 내가 자주 가는 마트도 물론 좋다.

아직은 약간 외국 마트 느낌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강렬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비일상" 느낌을 준다.


일본 마트보다 대체적으로 대용량으로 파는 경우가 많아서 상품들이 큼지막하게 진열되어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패키지에 적힌 한글들이 아직은 나에게 낯선 걸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오랜만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로 간다.

걸어가기 때문에 내가 들 수 있을 만큼만 사야 돼서 카트가 아닌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닌다.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딸기가 보여 바구니에 넣었다.

내 안에서 "살 생각은 없었는데 사게 되는 품목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게 딸기다.


다음은 채소 차례다.

청상추를 집어 본다. 봄이 와서 그런지 채소에 힘이 있다.

고기를 싸 먹으면 맛있겠다.


제철 음식인 취나물도 하나 사본다.

한 번도 직접 해보지 못한 된장무침을 해볼까 한다.


애호박, 감자 등 국에도 반찬에도 잘 쓰이는 채소들을 담고 제육볶음용 앞다리살도 담았다.

일본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앞다리, 뒷다리 나누어서 파는 게 정말 신기했었는데 지금은 요리별로 구별해서 구매한다.


두부와 요거트도 담아 계산대로 간다.

조금 더 담고 싶기는 하나 딸기와 감자 때문에 꽤 무거워졌다.


약간 아쉬움이 남아 마지막에 과자를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딸기에 집중하기 위해 포기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과자를 사게 됨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은 포기.)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무겁기는 하나 힘들지는 않다.

앞으로 며칠 동안 나와 가족을 채워 줄 무게다.



집에 도착하고 고기나 채소, 두부로 냉장고를 채운다.

정말 사소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이지만 내가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느낌이 든다.



텅 비어서 설정 온도보다도 차갑게 느껴지던 냉장고도 식재료로 가득 차 정이 느껴진다.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간장과 미역을 샀었어야 하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괜찮다. 다시 채우러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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