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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비망록
비망록 Vol.8 생각과 행동의 힘
"하얀 장미"
by
Illy
May 26. 2023
전쟁이 일어나면 잔혹한 희생에 대한 이야기도 수없이 들려오지만 독재자를 암살하거나 민간인을 지키는 등의 공적으로 "영웅"이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에서 정부에 저항한 어떤 청년들에
대해 정리해 보겠다.
〇
비폭력 레지스탕스 단체 "하얀 장미"
1941년 뮌헨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남매 한스 숄과 조피 숄이 결성했다.
나치의 정책을 비판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식으로 운동을 펼쳤으며 중심이 된 멤버는 뮌헨 대학 교수 한 명을 포함한 6명이었다.
활동은 1942년~1943년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으며 총 6종의 전단지를 배포했다.
6번째 전단지를 배포하는 도중에 숄 남매가 체포되어 중심 멤버 5명이 참수형에 처해졌다.
숄 남매에게는 판결이 나온 당일 오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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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 남매가 자라온 환경
5명 형제 중 둘째와 넷째였던 한스와 조피의 아버지는 시장이었고 뮌헨 대학에 다녔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계급이 높은 집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원래 한스는 나라의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진 점 등을 평가하고 나치를 지지해 나치의 청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외국 민요 등 문화적인 부분까지도 차단하는 나치의 정책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부전선에도 실제로 참가하면서 나치의 수법이나 독일군의 행동에 싫증이 났다고 한다.
한편 조피는 나치에게 비판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어 처음부터 나치에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속해 있던 "독일청년회"가 단속되어 자신도 16살 나이에 체포되자 큰 충격을 받으면서 나치를 혐오하게 되었다고 한다.
각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있었겠지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행동으로 옮긴 자세는 그들이 현대에 살았다고 해도 용감하고 대단한 일이다.
심지어 그들은 나치 독일에서 폭력적인 방법은 하나도 쓰지 않고 레지스탕스를 실현시켰다.
그들이 "독일의 양심", "영웅"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만큼 그들이 보았던 독일의 모습이 엉망이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목소리를 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결국 남매와 다른 멤버는 처형이 되지만 "하얀 장미"가 뿌리고 다녔던 전단지는 영국으로 전달되어 독일에 항복을 요구할 때의 자료로 쓰였다고 한다.
어떻게든 결실을 맺어서 다행이지만 만약에 이런 결과가 없었더라도 그들의 활동은 오래도록 기억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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