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을 미룰까.
날씨가 안좋은 연휴가 있었다 보니 영화를 평소보다 많이 봤다.
그런데 지금 그 영화들에 대해 생각을 해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재미있게 봤었는데. 보고 나서 쓴 메모를 보지 않으면 흐름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가 없다.
이번만 이러는 건 아니다.
옛날부터 그랬고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도 그렇다.
당연히 사람이 한번에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또 어쩔 수 없다.
물론 모든 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재미있게 보았고 내 취향이었고 주인공이 매력적이었고... 인상 깊었던 부분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희미하게나마 남는다.
하지만 가령 주인공의 아빠가 말한 대사, 장면의 순서 등의 디테일은 대부분 기억이 안 나고 중반이 인상 깊었던 영화는 결말이 어땠는지 까먹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좋은 작품들을 너무 흘러 보내듯이 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봤다"라는 도장만 찍고 온 듯한 느낌이랄까.
소설은 읽으면서도 메모를 하고 있고 영화도 꼭 날자와 함께 글을 남겨두니 그걸 보면 어느 정도 생각이 나기는 하지만 그 메모가 없다면 내 안에는 "감동, 재미있었음, 마음이 아팠음" 이런 단순한 평(이라고 하기에도 조잡한)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작품을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메모를 해 놓은 책과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보는 것이다.
옛날에 읽은 책들을 지금 읽으면 느낌도 다를 것 같고 어린 내가 놓친 부분을 잘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부모님 집에 두고 온 책들을 다 가지고 올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새로 사놓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책이나 "마이리스트"에 저장해 놓은 영화들이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작품이 이미 많고 또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나는 많은 책과 영화를 접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도 "도장을 찍어 왔다".
물론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내 행복한 시간을 위해서라면 같은 콘텐츠를 반복해서 보는 건 좋을 것 같지만(실제로 그렇게 여러 번 꺼내 본 영화나 책이 몇 개 있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감상은 지금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다.
결국 고민 끝에 잠정적으로 내린 결정은 개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 작품을 만났음에 감사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그래야 행복한 시간을 위해 여러 번 보게 되는 작품도 늘어날 거니까.
그리고 필요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하는 낙관적인 기대를 해보기도 한다.
한번 내 인생에 들어왔으니 어떤 타이밍에 다시 나에게 힘을 주겠지 싶다.
도장만 찍은 것 같지만 도장이라도 찍었으니 다행이라고 나를 달래 본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정도로 내가 소화를 잘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앙코르는 조금 더 미루어 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