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고 싶은 마음

by Illy

정말 오랜만에 머리를 10센치 이상 잘랐다.



내 단발병은 갑자기 찾아왔다.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하얀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긴 머리카락을 보기 싫어지는 타이밍과 기분 전환이 필요한 타이밍이 겹친 모양이다.



나는 자르고 싶은 마음이 식기 전에 열심히 미용실을 검색하고 내가 예쁘다고 느낀 스타일이 나와 있는 미용실을 예약했다.



미용실은 여기저기 다녀본 것 같지만 어디를 가든 내가 항상 거울 앞에서 하는 말이 있었다.

"머리를 묶을 수 있는 길이로 해주세요"라는 말이다.



머리를 묶는 건 여러모로 좋다.

일단 묶으면 덥지 않고 활동하기에 편하다.


스타일적인 부분에서 봐도 머리를 묶게 되면 어떻게 자르든 결국은 비슷해져서 완성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머리를 묶는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보험,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전함, 무난함에 조금은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일을 확 바꾸고 싶다기보다는 그런 보험 없는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묶지 못하는 길이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묶지 못하면 활동 면에서도 미적인(?) 부분에서도 감당해야 할 게 많을 거 같았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간을 두면 다시 길어질 머리부터 바꾸려고 하는 것 자체가 약간 방어적이다는 생각도 들지만 거의 15년 이상 안 해본 머리 스타일에 도전하려니까 긴장도 됐고 설렜다.




손이 빠르다는 평이 많았던 선생님이 과감하게 내 머리를 자르셨고 이 정도로 되냐고 한 번 물어보셨을 때 나는 "조금 더 잘라주세요"라고 했다.



다 끝난 지금은 이 한 마디를 하지 말걸...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내 생각이 아닌 기분에 맡기고 싶었고 그 결정에 무조건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선생님 손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끝나고 나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후회도 되고... 만족스럽기도 하고 그랬다.




미용실을 나오니 허전하다.


머리 15센치 말고 또 뭘 잃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로 채워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세일 중인 티셔츠를 구매했다.


옷 가게에서 거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내 모습(머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그런 내가 웃겼다.


지하철을 타니 올 때에는 많이 보여서 멋대로 내 편으로 여겼던 단발 여성들이 거의 안 보이는 것 같아 이상하게 외로웠다.



이 머리 스타일이 실패인지 성공인지는 내가 정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해보자면 실패인 것 같다.


하지만 내일은, 3일 후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른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즐기는 일이다.

머리를 묶지 못하는 지금을 만끽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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