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대학살 사건이며 후투족 과격파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을 살해했다.
이 대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80만 명~1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당시 르완다 인구의 15~20%이다.
학살은 12주 동안 계속되었지만 희생자의 80%는 초반 6주 중에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〇독일, 벨기에 식민지 시기에 심어진 "인종차별적" 사상
르완다는 1899년부터 독일이,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벨기에가 식민지지배를 했다.
독일은 투치족을 우대하고 다수파인 후투족을 지배하는 방식의 간접 통치를 하였으며 벨기에가 식민지 지배를 위임받은 후에는후투인지 투치인지 명시하는 신분증이 도입되는 등 후투족과 투치족의 구분이 보다 확실해졌다.
이 과정에서 좋지 않은 대우를 받은 후투족은 불만을 가지게 된다.
원래 후트와 투치는 언어나 종교도 동일하고 혼인도 교류도 이루어지는 사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구별을 하게 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상이 하미틱(Hamitic) 가설이다.
이는 John Hanning Speke(1827-1864)가 내세운 가설이며 Hamites(함족)들이 흑인보다 우수하고 아프리카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고 하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주장이었다.
이 생각을 굳게 믿었던 유럽 국가들에 의해 르완다에서는 투치족, 후투족(트와족도 있지만 이 부분은 나중에 정리하겠다)을 외모적으로 나누어 계층이나 권리를 부여하는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〇평화적 합의가 학살로
르완다는 1962년에 식민지에서 독립을 이루고 1974년에는 후투족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투치족은 우간다로 거점을 옮기고 반정부군인 RPF(르완다 애국 전선 Rwandan Patriotic Front)를 형성하며 반란을 이르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1990년에는 RPF가 르완다로 들어가 내전이 시작되었고 1993년 8월 아루샤 협정이라는 평화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전쟁은 끝이 보이게된다.
하지만 1994년, 후투계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고 이를 계기로 후투족 과격파에 의한 대학살이 시작된다.
간단하게만 적었지만 찾아보니 엄청 복잡하고 뿌리 깊은 원한이나 울분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즉 후트가 잘못했다, 투치가 잘못했다로 끝날 문제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 후투족 정부가 국민을 선동하고 투치족을 죽인 건 맞지만 우간다도RPF를 지원하고 있었고,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킨 사건(정확히 범인이 밝혀지지는 않았다)에서는 조사 단계에서 프랑스가 자료를 자국으로 가져가는 등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단순히 후투족과 투치족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애초에 독일이나 벨기에가 명확히 투치족과 후투족을 구분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냥 평범한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 문제를 빼놓고 르완다 국민만의 잘잘못, 잔인함 등을 따지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학살 자체는 정말... 잔인하다)
이 학살이 엄청난 비극으로 느껴지는 건 무엇보다도 어제까지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이웃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종교도 같고 언어도 같고 결혼도 할 수 있는데 친구나 친척을 학살하게 된 세뇌와 선동...
10대 때 "호텔 르완다"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공부하는 김에 다시 한번 봐볼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트와족에 닥친 비극에 대해서 적지 못했으니 다음 글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