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by 민현

오전 11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집 근처 정류장을 7시 43분에 지나는 공항버스를 타야 했다. 그럼 몇 시에 일어나야 하나. 늦어도 6시 30분에는 일어나야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잠을 깨고, 남은 짐도 꾸릴 수 있다. 요 며칠 8시는 넘어야 겨우 일어났었는데, 2시간이나 빠르다. 아내의 알람은 6시 30분, 내 알람은 6시 35분으로 맞췄다.


공항버스 타는 곳에 도착하니 7시 30분. 여유가 있다. 아, 맞다, 이제 공항버스 미리 예약해야 하는데, 하는 아내의 말에 버스앱을 열고 보니 예약 불가능 상태였다. 월요일 아침인데 자리가 없진 않겠지. 공항버스는 제 시간보다 1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출근하는 차들과 겹쳤나 보다. 15분을 더 기다리고야 도착한 버스는 만석이었다. 기사 아저씨가 출입문 계단에 앉아야 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래야지. 이 버스 놓치면 비행기도 함께 놓치는 건데. 근데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버스인데 그래도 되는 건가. 한 달을 못 보게 될 아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처음 20분은 넓은 창 앞으로 뚫린 고속도로를 보느라 지루하지 않았는데, 점점 허리가 아파왔다. 딱딱한 바닥 때문에 엉덩이도 아팠다. 내 체력은 한계가 있고, 그건 방콕까지의 6시간, 비행기의 좁은 좌석에서 써야 하는데, 공항버스의 출입문 계단에 앉아 쓰고 있다.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수화물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마치니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았다. 공항 절차가 예전보다 빨라진 느낌이다. 여행객 수요가 늘면서 비행기 값이 꽤 비쌀 거라 각오했는데, 에어아시아 티켓이 38만 원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양호해, 하며 예약했는데, 수화물 20kg을 추가하니 7만 원씩 14만 원이 추가되었다. 비싸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세 편 다운받았다. 비행기에서는 잠을 자지 못한다. 좁은 좌석에서 6시간을 맨 정신으로 보내야 한다. 6시간을 견디려면 영화라도 봐야 했다. 첫 번째 영화는 고양이와 할아버지라는 일본 영화였다. 젊은 사람들이 도심으로 떠난 한적한 섬 마을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할아버지의 일상이 그려졌다. 고양이 이야기인 줄 알고 다운받았는데 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장면마다 고양이가 많이 등장하긴 했다. 아직은 버틸만했다.


두 번째 영화는 알파. '2만 년 전 유럽'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했다. 2만 년 전이라니. 구석기시대잖아. 아니나 다를까 영화 시작부터 유럽인들은 돌을 떼냈다. 알파는 늑대의 이름이었고, 야생의 알파가 길 들여지는 과정의 내용이었다. 검색을 좀 해보니 개가 가축화된 게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 이야기였네. 최초의 반려견 이야기.


비행기가 곧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메시지가 나왔다. 창 밖을 보니 구름이 두터웠는데, 비는 내리지 않았다. 9월이면 우기이고, 비가 많이 올 것은 각오하고 있긴 했지만,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아가는 시간만큼은 비가 안 왔으면 했는데 다행이다.


입국심사대는 이제 막 도착한 사람들로 붐볐는데, 입국심사를 처리하는 부스는 충분히 넉넉했다. 각 부스마다의 줄은 길지 않았다. 심사를 기다리며 비행기에서 6시간 동안 잠들었던 핸드폰을 깨우고 로밍 확인을 하고, 쌓인 알람을 지웠다. 그러다 심사대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어린 커플이 보였다. 핸드폰을 꺼내 심사관에게 보이고, 뭐라 뭐라 손짓을 하고, 난감한 듯 둘이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일일까. 해외여행이 처음이어서 입국심사가 서툰가. 백신 접종 완료 증명서를 출력해오지 않았나. 뭐.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그게 여행의 재미인 거고 지나서는 추억이 될 거야.


내 차례가 됐다. 능숙하게 여권을 펼쳐 심사관에게 넘겼다. 심사관이 요구하기 전에 미리 지문 등록도 했다. 자, 얼른 입국 도장을 찍어라. 유심히 여권을 들여다보던 심사관이 리턴 티켓을 보잖다. 내가 방콕에 눌러앉을까 봐 그러나. 리턴 티켓을 요구한 심사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티켓을 건네자 출국일이 한 달 후인 것을 본 심사관이 한 달 동안 방콕에서 뭘 할 건지를 물었다. 그러게. 난 그 긴 시간 동안 방콕에서 뭘 하게 될까. 나도 잘 모르겠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심사관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여행, 그냥 여행하려고, 라고 자신 없는 말투로 답하니 이번엔 방콕에 예약한 숙소가 어디인지를 물었다. 왜. 노숙이라도 할까 봐? 핸드폰에서 예약한 숙소 페이지를 열어 심사관에게 건넸다. 그는 내 핸드폰을 받아 들고 화면을 신중히 들여다봤다.


내가 의심스러웠나. 원래 성격이 까칠한 심사관인가. 아니면 단지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건가. 그는 쉽게 입국 도장을 찍어주지를 않았다. 이래서 앞의 커플도 시간이 걸린 거구나.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표정에 싸늘함을 장착했다. 내게서 뿜어지는 한기를 느꼈을까. 심사관이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었다. 어차피 찍어 줄 거면서. 돌려주는 여권을 낚아채듯이 잡고는 빠르게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왔다. 원래는 친절히 두 손을 모으고 웃는 얼굴로 코쿤캅이라 말하려 했었다. 처음으로 만나는 태국인에게 건네는 첫 번째 인사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내 첫 번째 코쿤캅을 그에게 주려던 마음을 접었다. 나의 차가움이 그에게 잘 전달됐기를.




방콕의 하늘은 구름으로 하얬다. 습기가 담긴 공기에서 묵직함이 느껴졌지만, 생각만큼 더운 기운은 없었다. 방콕 도심으로 향하는 공항전철 안에서 계속 입국 심사관의 말이 떠 올랐다. 방콕에서 한 달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의 청명한 가을을 등지고 온 이곳, 하루에도 몇 번씩 벼락이 치고 빗줄기가 쏟아지는 우기철의 방콕에서 나는 한 달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이곳에서의 한 달은 한국에서 보내는 한 달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김영하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본업이었던 글을 마음껏 쓰지 못할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자신의 어린 예술가를 잃었다고 했다. 그렇게 깊숙이 숨어버린 어린 예술가를 다시 찾으려는 것이 시칠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라 밝혔다. 어린 예술가를 찾으러 떠난다니. 역시나 유명한 작가는 여행의 이유도 멋지다. 나도 방콕에서 뭔가를 찾긴 해야 할 텐데. 한 달 동안 찾을 수 있으려나.


어쨌든 나는 지금 방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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