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매일 해야 해?

by 민현

3년 전, 아직 은퇴를 하기 전, 태국 치앙마이에서 혼자 한 달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땐 회사생활로 꽤나 지쳐있었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조금은 심심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숨 좀 돌리며 털썩 앉아있기만을 하루 종일 하고 싶었다. 치앙마이는 그래서 고른 곳이었다. 치앙마이는 방콕처럼 번잡스럽지 않고 조용한 곳, 뭘 해보려 해도 딱히 할 만한 것들이 없는 곳이었다. 치앙마이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번화가가 있었고,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그 번화가 안에서 숙소를 골랐는데, 그런 곳은 피하고 싶었다. 그때 내가 골랐던 숙소는 번화가에서 차로 10분은 떨어진, 외진, 황량한, 밤이면 주위의 모든 불들이 꺼지는 적막한 곳에 위치했었다. 그 쓸쓸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 외딴곳에서 난 고작 일주일을 버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고문이었다. 시간은 한없이 길고 느렸다. 운동을 해도, 책을 읽어도, 동네 산책을 해도, 한참을 멍을 때려도 해는 지지 않았다. 써도 써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두려웠다. 결국 스쿠터를 렌트했고, 번화가를 쏘다니며 무언가 할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요가를 하고, 원어민 영어 수업을 듣고, 타이마사지를 배웠다.


외국에서 혼자 한 달을 산다는 건 어쩌면 시간과의 싸움이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16시간과의 싸움인 것이다. 다양한 할 것들을 무기로 시간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방콕에서 한 달을 지낼 숙소를 고르면서 고려했던 부분은 두 가지였다. 쇼핑몰이나 식당, 카페가 많은 번화가인 곳, 근처에 산책할 만한 큰 공원이 있는 곳. 그러니까 결국은 다양한 할 것들이 많은 곳.




방콕의 숙소 위치를 정해야 했다. 구글맵을 열고 방콕을 지도 한복판에 놓고, 두 손가락으로 조금씩 확대했다. 큼직해 보이는 공원 두 곳이 보였다. 룸피니 공원과 벤짜끼띠 공원. 메트로 역들이 공원을 감쌌다. 맵은 각종 쇼핑몰, 식당, 호텔들 표시로 어지러웠다. 여기네.


위치는 정했으니 숙소 차례였다. 에어비엔비를 열고 그 근방의 숙소를 검색했다. 방콕의 중심가여서인지 숙소 가격이 꽤나 비쌌다. 그 근방을 조금만 벗어나면 숙소 가격이 반으로 줄었다. 고민이 됐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숙소 가까이에 공원은 꼭 있어야 했다. 아침엔 달리기를 하고 저녁엔 산책을 할 수 있는, 그렇게 하루 서너 시간은 책임져 줄 수 있는 공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냥 여기로 하자.


숙소의 후보는 두 곳으로 좁혀졌다. 한 곳은 공원에서는 가까웠지만 조금 좁았다. 한국의 흔한 오피스텔처럼 보였다. 다른 한 곳은 공원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대신 거실과 소파가 있었고, 20만 원 정도 더 비쌌다. 스트리트뷰로 공원 오가는 길을 살펴보니 두 번째 숙소 길이 횡단보도를 건너더라도 더 쾌적해 보였다. 여기다. 한 달 여기서 살자. 그렇게 나름 진지하고 신중하게 고른 값비싼 숙소였다. 그런데 체크인 첫날부터 고작 수건 몇 장 때문에 맘이 상했다.


28박 170만원인 숙소

체크인을 하고 들어와 짐을 풀고 숙소를 둘러보았다. 냉장고는 넓었고, 싱크대 선반의 그릇과 냄비, 조리도구들도 깨끗했다. 화장실은 샤워 공간과 잘 분리되어 있었고, 거실의 소파도 푹신했다. 마지막으로 침대를 확인하는데 침대 위에 수건 두 장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장실 수납장을 찾아봐도 수건은 두 장이 전부였다. 베리(Airbnb 관리인이다.)에게 연락했다. 수건이 두 장뿐이던데, 몇 장 더 받을 수 있을까? 한 시간이 지나서 베리에게 연락이 왔다. 미안한데, 수건은 두 장까지만 제공해. P.S. 세탁기로 빨아 쓰면 될 거야.




아니, 베리야. 넌 수건 두장으로 한 달을 산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여긴 방콕이잖아. 덥잖아. 땀이 많이 난다고. 아무리 게을러도 하루에 한 번은 샤워를 해야 하잖아. 근데 두 장이라고? 세탁기로 빨아서 쓰라고? 그럼 매일 세탁기를 돌려야 해? 수건 한 장 빨기 위해서? 넌 집에서 그렇게 매일 빨래하면서 살아? 내가 매일 빨래하러 방콕에 온 건 아니잖아. 라고 베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 알았어. 라는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소심하지만 뒤끝은 있다는 걸 베리에게 보이는 걸로 만족했다. 수건 그냥 마트에서 몇 장 사면되지 뭐.


비워져 있는 냉장고를 채울 식재료들, 그리고 한 달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필품들을 메모지에 하나하나 적는다. 맥주, 곁들일 안주, 우유, 달걀, 토마토, 키친타월, 비누, 쓰레기봉투 등. 그리고 매일 빨래를 할 수는 없으니 메모지에 수건 네 장도 빼놓지 않고 적는다. 내일은 그 메모지를 들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야겠다. 방콕에서의 일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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