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당모의(作黨謨議) 신년 특집: 토끼 >
그날 내 감정이 외줄 타듯 위태롭긴 했어. 마침 보름달이었고,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이어서 달에 간 아버지가 잘 보였거든. 평소엔 거들떠도 안보고 그냥 자버렸는데, 그날따라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더라. 날 버리고 떠났으면 달에서 떡방아 찧으면서 잘 살던가. 허리가 안 좋다고? 내가 가업을 잇길 바란다고? 아버지가 보낸 전보 한통을 손에 들고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키고 있었어.
그때 거북이 녀석이 찾아 왔어. 네가 이 밤중에 왠일이냐? 했더니 대답도 없이 자리에 앉아서는 내 앞에 놓인 소주병을 가져다 벌컥벌컥 마시더라. 왜? 뭔일인데? 하고 재차 물으니 그제야 한다는 소리가 둘째 놈이 요즘 부쩍 반항이 심해졌다고. 사춘기땐 다 그러니 눈 감아 넘겼었는데, 어제 둘째 놈이, 그 썩을 놈이 아비 가슴에 대못을 박더라는 거야. 자기는 굵게 살거라고. 아빠처럼 가늘고 길게 살지 않을 거라고. 아빠가 오래 사는거 말고 잘 하는 게 뭐가 있냐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만 머리를 등껍데기에 처박고는 나오지를 않더래. 둘째야. 둘째야.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하고 협박도 해 봤는데 안 통한다고.
아니 지 아들놈 한탄을 왜 이 늦은 밤 나에게 와서 늘어놓나 생각하고 있는데, 내 눈치를 슬쩍 한번 보던 거북이 놈 본심을 꺼내더라. 둘째놈 앞에서 자기와 달리기 시합 한 번만 해 달래. 그리고 눈치껏 져 주면 안되겠냐고. 오래 사는 거 말고도 잘하는 게 있다는 걸 둘째놈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야, 달리기로 날 이기더라도 니 아들 놈이 진심으로 믿겠냐? 그러지 말고 그냥 씨름이나 한판 하자, 했더니 씨름은 절대 안된데. 자기 뒤집히는 거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어릴 때 뒤집힌 채로 1박 2일 동안 있었다나. 그 모습을 우리 아버지가 밤새 떡방아 찧으면서 쳐다 보셨다고.
거북이 놈, 바다에 있을 때는 나름 잘 나갔었다던데. 나 때문에 용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에 터 잡고 살고 있거든. 시시탐탐 내 간이나 노리면서 사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답답할까. 처음엔 그 녀석 꼴도 보기 싫었는데, 힘들게 사는 모습이 나 때문인가 싶기도 해서 이제는 미안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나도 달에서 떡방아나 찧으며 살아야 하는데, 달리기 한 번 져 주는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겠다 했어. 거북이 놈, 등껍질을 흔들어 대며 고맙다고 하더라.
달리기 결과야 뭐 다들 알겠지. 기자 놈들이 싸질러 놓은 글들을 한번쯤은 봤을 테니. 악마의 편집이란게 이런 건가. 시건방진 토끼, 거만 떨던 토끼, 자만에 빠진 토끼. 기자 놈들 아주 신이 났더구만. 악플도 1,000개가 넘게 달리더라. 하루종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밤에 거북이가 소주 두 병 들고 한 잔 하자며 왔어. 오늘 고마웠다고, 둘째놈도 머리 내어 놓았다고, 내 덕에 자기 근심 하나 덜었다고 하는 거 보니 져 주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각자 소주 한 병씩 들고 나발을 불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 이제 달 가면 넌 어쩔거냐? 너도 이제 용궁으로 돌아가야지.
용궁은 무슨. 거기 떠난지가 벌써 몇 년인데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다.
내 간이 없어서 못 돌아가는 거냐? 지금이라도 간 좀 떼어 줄게. 그래도 고향이 살기 편할 거잖아.
너 간 이제 필요 없다. 간 애타게 찾던 용왕 몇 년 전에 죽었다더라.
노친네 죽었구나. 그럼 그냥 돌아가도 되지 않아? 왜 여기 계속 있는 거야?
왜긴. 이제 여기가 집이다. 내 가족 있는 곳이 고향인거고. 어차피 마누라가 육지 출신이라 헤엄도 못 쳐.
어째 나 때문에 너 인생 꼬인 것 같아서 맘이 좀 그렇네.
아니다. 꼬이긴. 육지에서 사는 거 뽀송뽀송하고 좋아. 근데 너 달에는 언제 가냐?
다음 보름달 뜨기 전에는 가야지. 아버지 허리가 많이 안 좋은가 봐. 몇 달 전부터 빨리 오라고 어찌나 성화를 부리던지.
달 가면 떡방아는 매일 찧어야 하는 거냐?
아니, 매일하면 몸이 못 버티지. 한 달에 2주는 쉰데. 하현부터 그믐, 다음 상현까지는 휴가라더라. 그땐 어차피 떡방아 찧는 것도 안 보이니까.
그래도 한달에 2주는 쉬니 다행이네. 일하는 날은 어때? 떡방아 찧다가 한 번씩 쉴 시간은 있고?
응. 하루 2교대로 돌아간데. 내가 아시아쪽 야간 담당인거고, 유럽쪽 야간은 집게발 큰 게가 있는데, 그 놈이 맡는다더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요령껏 해. 요즘 세상에 누가 달 본다고. 미세먼지도 심해서 뿌옇잖아.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아. 지금도 달 한 번 봐라. 저 모습이 지금 떡방아를 찧고 있는 건지, 떡방아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우리 아버지다.
아... 암튼 내 말은 너무 애쓰지 말고 적당히 스스로 몸 챙기면서 하라는 말이야.
그래, 그래야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디든 사는 거야 다 비슷비슷 하겠지.
보고 싶어서 어쩌냐.
어쩌긴. 고개만 들면 달 보이고, 나도 바로 보일 텐데.
그래. 그러네.
너야말로 건강 잘 챙겨. 바닷놈이 육지에서 사는 게 만만치는 않을 텐데. 한 번씩 바닷가 가서 짠물도 좀 들이키고 그래.
내가 좀 느려서 한 번 다녀오려면 몇 년씩 걸려...
아...
농담이다. 한강 타고 가면 강화도 앞 바다까지 금방 가거든. 생각날 때마다 가서 짠물 들이키고 있으니 걱정 마라.
보고 싶어서 어쩌냐.
어쩌긴. 한번씩 나무 우거지지 않은 너른 언덕에 누워서 별이나 셀테니 달에서 내려다 봐라.
그래.
저기 자루에 감자 좀 담아 왔어. 미리 삶았다가 달 가면서 먹어라. 당근으로 채우고 싶었는데 지금 당근 철이 아니라네.
......
너 달 가면 정말 보고 싶어서 어쩌냐.
거북이 놈 뒤집히는 거 트라우마라더니 보름달 뜰 때마다 언덕에서 등 뒤집고는 날 보더라. 별 세는 척 하면서 말이야. 둘째놈이 다 컸어. 옆에서 지 아비 지키고 있다가 날 새면 아비 바로 뒤집고 앞장서서 가는데 기특하지. 달에서 떡방아 찧는 생활? 고되지. 고된데 그래도 할만해. 달이 둥그렇게 밝은 날,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거북이 놈 보면서 많이 웃어. 그렇게 한참 웃다 보면 참 많이 힘이 되거든.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