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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Feb 16. 2023

혼자의 시간

< 작당모의(作黨謀議) 22차 문제: 지하철에서 >, 그리고

   회사에 다닐 때엔 아침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갰다. 아침 8시에 알람이 울리면 5분 더 뒤척이다가 아직 떨치지 못한 잠을 얹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8시 33분.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고 출근할 옷으로 갈아입고 8시 56분에 집을 나서 지하철 역으로 간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서 있는 곳은 뒤에서 세 번째 칸, 두 번째 문 위치이다. 9시 5분,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이 들어온다. 지하철을 타고 빈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두 정거장 지났을 때 회사 사람이 타는 걸 본다. 며칠째 그는 같은 시간에(그러니까 9시 11분에), 뒤에서 세 번째 칸, 두 번째 문으로 올라탄다. 그도 분 단위로 아침시간을 쪼개는 걸까.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척하면서 내일부터는 네 번째 칸을 타야겠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그는 내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도 나를 못 본 체 한 걸지도 모른다. 지하철 역을 나와 서로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회사까지 15분가량 걷는다.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지하철에서의 낯가림이 언제 있었냐는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회사 안에서는 그와 난 제법 친한 사이이다.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출근길, 혼자의 시간은 소중했다. 옆의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오직 혼자의 시간, 넋이 나간 채로 멍을 때리는 그 말랑한 시간은 회사에서의 바짝 날이 선 팽팽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도록 미리 먹어 두어야 하는 마약 같은 것이었다. 회사 사람과 하는 얘기는 뻔하다. 그리 궁금하지 않은 서로의 일상과, 듣고 싶지 않은 업무 이야기. 고된 하루살이를 위해 꼭 필요한, 마약 같은 혼자의 시간을 의미 없는 잡담으로 망치지 않으려면 나도, 그도 낯을 가려야 했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도 한 번씩 혼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까운 도시로 여행을 간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부러워할 만한 일이라는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알았다. 그들은 여행지에서의 계획이나 일정보다는 아내의 반응을 더 궁금해한다. 혼자 여행 가면 뭐 해? 보다 앞서, 근데 아내가 보내 줘? 라며 놀라 묻는다. 그때마다 아내도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서로를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답 한다. 나 없이 혼자 있는 밤, 평소와는 다르게 맥주와 생라면을 먹으며 넷플릭스 막장 드라마를 즐기는 아내를 보면 그게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아내는 와인과 치즈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고른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리 낭만적인 건 아니다. 최근 혼자 다녀온 부산 여행에서는 도착하자마자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고는 초저녁부터 붉어진 얼굴로 숙소 침대에 쓰러졌다. 다음날은 해운대에서 송정까지 이어진 해변 산책로를 걸어 바다가 보이는 송정의 카페에 들렀고 계획으로는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거나 ‘서양미술사’를 읽으려 했지만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핸드폰으로 해외축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근처 맛집을 찾고 SNS의 짧은 동영상을 줄줄이 이어서 봤다. 저녁땐 다시 소주 한 병을 시키거나, 4캔에 만원인 맥주를 사 들고 숙소로 들어와 재미있지도 않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잠들었다.(‘서양미술사’를 읽다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떠올리며 잠들려 했었다.)


   혼자인 시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일탈을 마음껏 즐기고 온 죄책감 때문인지 쓸데없이 바람직하고 건전한 일상을 보낸다. 아내 역시 지난 며칠간의 일탈을 반성하면서 TV를 보는 대신 책 읽는 시간을 늘린다.(우린 혼자의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일탈이 필요했던 걸지도.)


   아침 일찍부터 집 근처 공원 산책을 나선다. 앞에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서로 몇 걸음 간격을 두고 걸으신다. 두 분의 간격이 줄지도, 그렇다고 늘지도 않는 걸 보면 두 분은 내외간이 분명하다. 앞선 분이 서둘러 걷는 건지 처진 분이 늦춰 걷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함께하는 산책이지만 두 분은 서로 혼자의 시간을 보내신다. 공원을 걷는 정도의 속도로 바람이 분다. 역시나 부산에 비해 공기가 차다. 아내의 손은 이미 내 점퍼 주머니 안에 들어와 있다. 함께 하는 시간이다.


   분 단위로 아침을 쪼갤 필요도 없고, 지하철에서 회사 사람을 만날까 긴장할 일도 없는 지금, 나의 시간은 대부분 말랑하다. (작당모의 글 발행 시간이 다가오는데 오늘처럼 아직 글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면) 바짝 날이 선 팽팽한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어쩌다 넋을 내보내고 멍을 때리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런 시간이 이전과는 달리 마약처럼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본능적으로 갈구하던 혼자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로,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해 온 작당모의가 잠시의 휴식을 가집니다. 필진의 개인 사정으로 갖는 충전의 시기일 뿐, 각자의 글쓰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동안 작당모의의 부족한 글들을 봐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며, 작당모의의 수작(手作)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모두들 건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번,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아진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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